#46. 마흔여섯 번째 책) 문태준, <맨발>
문태준의 첫 번째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을 읽고서 나는 그의 시가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두 번째 시집 <맨발>을 읽고서 나는 그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시집에 이르며 그의 시들은 훨씬 아름다워졌다. 그런데 시뿐만 아니라, <수런거리는 뒤란>에서 <맨발>로 도약했을 때 그는 스스로도 아름다워졌다. 이런 인상을 받은 것은 그가 풍경을 구제(救濟)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는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그 아름다움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시에서 아름다움이란 풍경의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그가 풍경에게 꼭 맞는 이름을 불러 주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바로 그 노력의 아름다움이다. 이 시인은 그저 아름다운 풍경을 언어로 아름답게 옮기지 않는다. 그가 창출하는 시적 미(美)는 버려졌거나 오래되었거나 낡고 해진 풍경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호명하는, 그 질박한 노력에서 시작된다. 요컨대 풍경이 있고, 그 풍경을 이용해 시를 쓴 게 아니다. 먼저 시가 있고, 그 시를 통해 풍경은 비로소 발견되며 이름 붙여진다.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12면, <한 호흡> 전문
이 시는 그 정확한 사례다.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의 풍경은 애초에 존재했던 풍경이 아니다. 시인이 "한 호흡"이라고 호명할 때, 그때서야 존재하게 되는 풍경이다. 시인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이라거나 "그 홍역 같은 삶"이라고 혼신의 힘으로 명명할 때, 이 풍경들은 우리 앞에 비로소 나타난다. 이것은 풍경의 묘사가 아니라 풍경의 발견이고, 문태준은 풍경의 이름을 '불러서' 발견한다. 이 시에서 그가 풍경을 부르는 방식은, 없던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이다.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어느새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의 생애를, 그 흐리터분한 시간을 "한 호흡"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이다. 이 시인이 불러주고 나면, 그제야 그 시간은 우리에게 인식된다. 그래서 이 호명은 아름답다.
없던 이름을 새로 지어 주는 일도 물론 어렵지만, 이미 있는 이름을 바꾸는 일은 더 어렵다. 새 이름은 기존의 이름이 갖던 의미를 품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이중의 작업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조개처럼 아주 천천히 뻘흙을 토해내고 있다는 말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언젠가 돌로 풀을 눌러놓았었다는 얘기
그 풀들이 돌을 슬쩍슬쩍 밀어올리고 있다는 얘기
풀들이 물컹물컹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얘기
-85면, <뻘 같은 그리움> 전문
‘그리움’은 오래된 풍경이다. 너무 오래돼서 이제는 낡은 풍경이고, 그만큼 흔해진 풍경이다. 문태준은 그런 ‘그리움’의 풍경이 다시 일어설 기회를 제공한다. 어떻게? 새롭게 불러 줌으로써. 그는 그 뻔한 풍경을 낯선 이름으로 불러 준다. 그리움의 풍경을 “조개처럼 아주 천천히 뻘흙을 토해내”는 풍경이라고 부르고, “당신이 언젠가 돌로 풀을 눌러놓았었”던 풍경이라고 부르며, “그 풀들이 돌을 슬쩍슬쩍 밀어올리고 있”거나 “풀들이 물컹물컹하게 자라나고 있”는 풍경이라고 부른다. 그러자 ‘그리움’은 이러한 새 이름들에 반응한다. 마치 뭐랄까,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던 짝꿍이 어느 날 화장도 하고 살도 빼고 화려하게 입고서 전혀 다른 사람인 마냥 짠 하고 나타난 느낌? 이 시에서 ‘그리움’도 전혀 다른 풍경인 듯, 그렇게 짠 하고 나타난다. 그가 ‘그리움’에 대해 어떤 새로운 발견을 한 것은 아니다. 이미 알고 있던 풍경을 낯선 이름으로 호명했을 뿐인데, 덕분에 그 익숙한 풍경이 새로운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나게 된다. 아름답게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다시 태어났다는 그 일이 아름답다. 이것이야말로 시인이 언어로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 중 하나가 아닌가. 하나 더 읽어보자.
세상 한곳 한곳 하나 하나가 저녁에 대해 말하다
까마귀는 하늘이 길을 꾹꾹 눌러 대밭에 앉는다고 운다
노란 감꽃 핀 감잎은 등이 무거워졌다고 말한다
암내 난 들고양이는 우는 아가 소리를 업고 집채의 그늘을 짚으며 돌아나간다
나는 대청에 소 눈망울만한 알전구를 켜 어둠의 귀를 터준다
들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찬물에 발을 씻으며 검게 입을 다물었다
-23면, <저녁에 대해 여럿이 말하다> 전문
‘그리움’에 이어 이번에는 ‘저녁’이다. ‘저녁’도 ‘그리움’만큼이나 낡은 풍경이다. 그 낡은 풍경이 문태준의 시선에 닿았으니 이제 어떤 새 옷을 입게 될까. 이 시에서 ‘저녁’ 풍경은 여러 존재들에 의해 이렇게 호명되고 있다. 먼저 ‘까마귀’는 이렇게 부른다. “하늘이 길을 꾹꾹 눌러 대밭에 앉는” 풍경. ‘감잎’은 이렇게 부른다. “등이 무거워”지는 시간. ‘들고양이’에게 저녁은 “우는 아가 소리를 업고 집채의 그늘을 짚으며 돌아나”가는 풍경이고, ‘나’에게는 “대청에 소 눈망울만한 알전구를 켜 어둠의 귀를 터” 주는 풍경이다. 이 새 이름들은 모두가 참 절묘하고 적실하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시가 되었겠지만 마지막 연으로 인해 이 시는 더 좋은 시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말할 차례, 그에게 ‘저녁’이란? 잔뜩 기대했는데 웬걸, “들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찬물에 발을 씻으며 검게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는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저녁 풍경’이 ‘말할 수 없는 풍경’이기도 한 걸까. 줄곧 ‘새 옷’이라는 비유를 써 왔는데, 이 경우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이 저녁 풍경의 새 옷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 마지막 연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게 아니고, 말하지 않는 것으로써 말했다. 어쨌거나 저녁 풍경은 문태준에 의해 이렇게 구제되었다.
위의 시들만 그런 게 아니다. 그가 ‘맷돌’을 “죽은 돌들끼리 쌓아올린 서러운 돌탑”(<맷돌>)이라 명명하거나, ‘비’를 “먼저 온 빗방울들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비가 오려 할 때>)라 호명하고, ‘할미꽃’을 “거친 꽃을 내뱉으며 늙은 영혼의 속을 꺼내 보이는”(<나는 심장을 바치러 온다>) 존재라고 이름 붙일 때, 풍경들은 새 이름을 부여받아 아름답게 살아난다. 그는 70년생으로 시인 진은영과 동갑이다. 스타일은 분명 다르지만 진은영이 ‘시인은 자기만의 사전을 가져야 한다’며 그녀의 첫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에서 케케묵은 단어들을 새롭게 정의한 일은, 문태준의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 두 훌륭한 시인들은 나이뿐만 아니라 이런 점에서도 닮았다. 그런데 진은영의 시집에서 볼 수 없었던 한 가지가 이 시집 <맨발>에는 있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여기에서는 '실패'가 있다. 마지막으로 한 편 더 읽어 보자.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나는 오글오글 떼지어 놀다 돌아온
아이의 손톱을 깎네
모시조개가 모래를 뱉어놓은 것 같은 손톱을 깎네
(중략)
햇솜 같았던 아이가 예처럼 손이 굵어지는 동안
마치 큰 징이 한번 그러나 오래 울렸다고나 할까
내가 만질 수 없었던 것들
앞으로도 내가 만질 수 없을 것들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이 사이
이 사이를 오로지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의 혀끝에서
뭉긋이 느껴지는 슬프도록 이상한 이 맛을
-33면,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부분
여기에도 눈이 번쩍 뜨이는 문장들이 보인다. 어느새 훌쩍 자란 아이의 손톱이 “모시조개가 모래를 뱉어놓은 것 같”단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마치 큰 징이 한번 그러나 오래 울렸다고나 할까” 살구꽃이 어느새 자라서 푸른빛 살구 열매를 맺은 모습을 보며,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가 언제 저렇게 자랐나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보다 더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이 표현이 시인에게는 충분히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그 ‘눈 깜짝할 사이’를 정확히 호명해 주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는 “이 사이를 오로지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하며 고민하지만 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 호명에 실패한 것이다. 그 실패를 더욱 쓰리게 만드는 것은 시인의 저 공허한 푸념이다. “내가 만질 수 없었던 것들/앞으로도 내가 만질 수 없을 것들”. 그렇다, 이 시는 실패의 흔적이다. 이는 그가 풍경을 새 이름으로 호명하지만 그것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려 준다. 그리고 낡은 풍경에게 하나의 정확한 이름을 붙여 주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이 고뇌하는지도 알려 준다. 이 실패 사례는 분명 다른 시집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다. 시집에 실려 세상 밖으로 나오는 시들은 소수의 성공 사례들이기 때문일 터,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실패의 흔적 때문에 그의 호명 작업은 우리에게 더욱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가 오래된 풍경을 구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가 아름답기 이전에, 그의 시작(詩作) 행위가 아름답다. 그는 ‘만질 수 없고, 앞으로도 만질 수 없을 것들’에 계속 도전하는 사람이고, 계속 실패할 것이다. 실패하기 위해 계속해서 시를 쓸 것이다. 그는 ‘맨발’로 시 쓰는 사람이다. 이것이 독자로서는 감사할 일이다. 앞으로 그의 손에 구제될 수많은 풍경들을 묵묵히 기다리는 일로, 그 고마움을 표현해야 한다. 한때는 서정시가 촌스럽다고 여기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우연히 그의 시집을 읽게 된 뒤로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는 ‘서정’이라는 풍경도 그에 의해 재호명된 셈이다. 내게 문태준은 서정의 다른 이름이다.
04.2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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