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마흔일곱 번째 책) 문인수, <뿔>
문인수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뿔』에는 그 유명한 시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가 실려 있다. 이번에는 이 시에 대해 이야기해 본다. 먼저 읽어보자.
말 걸지 말아라.
나무의 큰 키는
하늘 높이 사무쳐 오르다가 돌아오고
땅 속 깊이 뻗혀 내려가다가 돌아온다.
나갈 곳 없는
나무의 중심은 예민하겠다.
도화선 같겠다.
무수한 이파리들도 터질 듯 막
고요하다.
누가 만 리 밖에서 또 젓고 있느냐.
비 섞어, 서서히 바람 불고
나무의 팽팽한
긴 외로움 끝에 와서 덜컥,
덜컥, 걸린다.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
저 나무 송두리째
저 나무 비바람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나무는 폭발한다.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 전문
어떤 감정이든 그것이 심화되면 결국엔 슬픔이 된다는 말을, 소설가 은희경은 한 적 있다. 외로움이나 우울은 말할 것도 없겠거니와 기쁨이나 즐거움마저 그것이 반복되고 쌓이면 어느새 슬픔의 모습을 띄게 된다는 것. 모든 감정의 본질은, 혹은 모든 존재의 본질은 슬픔과 연루되어 있다는 뜻일까. 모든 감정은 슬픔으로 돌아온다는, 그 쓸쓸한 회귀를 주장하는 은희경의 말을, 문인수의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를 읽고 다시 떠올렸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시는 은희경의 저 말을 반대로 뒤집어 돌려주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감정이든 결국 슬픔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라는 게 아니라, 슬픔이 어떤 감정이든 될 수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슬픔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으로부터 비로소 발산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시를 한 발 떨어져서 보면 기하학적 대칭성을 발견할 수 있다. 총 여섯 개의 연으로 되어 있는 이 시는 1연과 6연, 2연과 5연, 그리고 3연과 4연이 짝을 이루고 있다. 아마도 3연과 4연 사이에서 이 시를 절반으로 접으면 정확히 포개질 것이다. 그러면 포개지는 윗부분(1~3연)을 이 시의 1부로, 아랫부분(4~6연)을 2부로 나눠 보면 어떨까. 단순히 대칭이기 때문에 나눠 보자는 것은 아니다. 이 시를 둘로 나눠 읽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는데, 1부와 2부에서 화자가 정확히 반대되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2연에서 이 시가 함축하는 이원성을 지적하는 독법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늘과 땅, 상승과 하강 등의 대립항이 공존하고 있다. 그런데 그보다는 그들의 등장 순서야말로 내겐 의미심장했다. 나무는 하늘 높이 “오르다가 돌아오고”, “내려가다가 돌아온다.” 만약 시인이 단순히 이원성의 충돌만을 보여 주고 싶었다면 이렇게 써도 무방했을 것이다. ‘돌아오다가 올라가고’ 혹은 ‘돌아오다가 내려간다’. 그러나 시인은 ‘발산’의 이미지를 먼저 쓰고, ‘회귀’의 이미지를 나중에 썼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도 그는 이파리들이 “터질 듯 막/고요하다”라고 쓰고 있다. ‘고요한 듯 막 터진다’고 쓰지 않는다. 이렇듯 2연에서 ‘하늘’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땅’이, ‘도화선’이 먼저 나오고 ‘고요’가 나오는 것은 우연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대척점에 있는 두 이미지 중에서, 회귀의 이미지가 발산의 이미지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시인이 ‘발설’보다는 ‘침묵’을, ‘탈출’보다는 ‘갇힘’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침묵과 갇힘은 1연의 “말 걸지 말아라”와 2연의 “나갈 곳 없는/나무의 중심”이라는 대목을 통해 재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2부에서는 이 순서가 역전된다. “슬픔은 물로 된 불”이라고 말하는 것은, 앞선 1부에서와는 반대되는 형태의 진술이다. 아마 ‘슬픔은 불로 된 물’이라고 썼어야 ‘발산-회귀’라는 원래의 순서에 부합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그 방향이 역전되어, ‘회귀-발산’의 순서를 따르기 시작하고 있다. 이제 화자는 “비바람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타오른다”라고 말하지 ‘불길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젖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1부에서 나무는 ‘터질 듯 고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2부에서 나무는 “폭발한다.” 이 역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 순서란 곧 승패가 아닌가. 예컨대 ‘물’과 ‘불’은 서로를 배척하면서 대립한다. 싸운다. 그럴 때 슬픔이 ‘물로 된 불’인지, ‘불로 된 물’인지는 그 둘의 싸움의 결과로 결정될 것이다. 시인이 “슬픔은 물로 된 불”이라고 썼다면, 그건 불이 이겼다는 뜻이다. 같은 이유로 ‘비바람’을 ‘타오름’이 이긴 셈이고, ‘고요함’을 ‘폭발’이 이긴 게 된다. 1부에서 ‘고요함’이 ‘폭발’을 이길 때(“터질 듯 막/고요하다”), 나무는 “오르다가 돌아오고”, 또 “내려가다가 돌아”오며 “나갈 곳 없”이 제 안에 갇힌 존재였다. 그래서 “팽팽한/긴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2부에서의 나무, “송두리째” 타오르고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나무는, 과거의 ‘침묵’과 ‘갇힘’을 극복한 존재로 그려진다. 불이 물이 이겼듯이, 이를 나무가 슬픔을 이긴 거라고 말해도 좋을까.
다시 은희경의 말로 돌아오자. 그녀의 말을 요약하면 슬픔은 도착지다. 우리는 슬픔에 도달해서 멈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를 요약하면 슬픔은 출발지다. 슬픔으로부터 비로소 무언가가 출발할 것이다. 빅뱅으로 우주가 생겨났듯, 슬픔은 타오르고 폭발해서 새로운 무언가가 될 것이다. 한번 더 반복하자면, 어떤 감정이든 결국 슬픔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라는 게 아니라 슬픔이 어떤 감정이든 될 수 있는 것이고, 슬픔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으로부터 비로소 발산되는 것이다. 이때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가 추측의 문장이라는 점이 내겐 또한 절묘했다. 시인은 이렇게 씀으로써 만일 “슬픔은 물로 된 불이다.”라는 잠언식의 문장으로 썼더라면 가져가지 못했을 효과 하나를 거두는 데 성공하는데, 그것은 바로 소망의 효과다.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추측하는 어조에는 어딘가 간곡하게 기도하는 느낌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슬픔이 물로 된 불이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슬픔이 고요하지 말고 타올랐으면 좋겠다고, 자꾸만 돌아오지 말고 폭발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슬픔이 도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일이다.
그러니 나무가 슬픔을 이긴 것인가? 우리는 이렇게 대답하자. 시인은 나무가 슬픔을 이기기를 간곡히 바랄 뿐이다. 한 번 슬픔에 매몰되기 시작하면 그 슬픔은 스스로 깊어지는 슬픔이 될 것이다. 슬픔이 또다른 슬픔을 낳으며 방대해지고 막강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슬픔으로 자꾸 되돌아가지 말고 슬픔을 폭발시키자. 우리는 슬픔에게 "말 걸지 말"자. 그의 또다른 시 「저녁별 -건널목에서」에서 한 구절 뽑아 옮기며 마무리한다. "나는 그러면 저 어느 별인지요./이 방대한 어둠이 다 당신입니까"
04.24.22.
instagram : 우리 시대의 책읽기(@toonoisylonelinesss)
naver blog : blog.naver.com/kimhoey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