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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Jul 24. 2022

작품명 '해석불가'

#68번째 책) 강정, 『활』, 문예중앙(2011)


"나는 그의 시를 해석할 수 없다." 시인 강정이 박정대 시인의 시집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에 부치는 글에서 쓴 문장이다. 그리고 이제 저 말은 강정의 시 앞에 내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이 된다. 그의 첫 번째 시집 『처형 극장』에서부터 『활』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는 것뿐이다. 나는 그의 시를 해석할 수 없다…….

기호학에서는 언어를 '기표'와 '기의'의 구성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소쉬르는 기표를 기호가 나타나는 물질적 형태, 즉 말해지거나 쓰여진 단어라고 설명했고, 기의란 기표가 환기시키는 대상의 심적 영상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요컨대 들판 위의 나무를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 글자나 음성 -'나무', 'tree', '木' 등이 기표라면, 이 말들을 듣고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개념이나 이미지(그러니까 나무의 모습 그 자체)는 기의에 해당한다. 기표와 기의는 각각 프랑스 원어로 '시니피앙(signifiant)'과 '시니피에(signifié)'의 번역어다. 어렵다면 기표는 '표현'으로, 기의는 '의미' 정도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겠다.

강정의 시집을 펼치면 눈에 들어오는 저 수많은 기표들, 그러나 그의 기표들이 일상적인 기표와 구분되는 시적 기표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시인의 기표는 기의로 곧장 연결되지 않는다. 가령 '들판 위의 나무'라는 기표는 우리가 손쉽게 그에 해당하는 기의를 떠올릴 수 있는 데 반해, "불을 보면 환장하는 방화범의 후손"(「고별사」 중)이나 "지구가 발밑에서 미끄러진다"(「남과 여」 중)와 같은 기표들은 어떤가. 이들을 읽고 무언가를 떠올리는 일은 분명 어렵다. 낯설고 모호하기 때문에 그렇다.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로 단번에, 그리고 일 대 일로 치환되지 않기 때문에, 시의 언어들은 난해하다거나 불친절하다는 오명을 써 왔다.

여기에는 아마도 언어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시가 공허한 말놀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언어는 의미를 퍼나르는 컨베이어 벨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의미 전달만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어떻게' 쓰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쓰느냐. 언어는 의미를 명확하고 신속하게 전달한 후 사라진다. 정확한 의미만 전달된다면, 표현이 대체 무슨 상관이랴? 시니피앙은 시니피에라는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들의 관심사는 시니피앙에 있다. 때문에 시 창작은 의미가 아니라 표현의 층위에서 이루어진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가령 시인 강정이 "상처를 천 년 정도 문지르면 꽃이 필까"(「선인장 입구」 중)라고 썼을 때, 이 문장은 곧바로 의미로 연결되는 대신 표현 그 자체로 존재한다. 기표가 지시하는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단 하나의 기의가 아니라, 그것을 읽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기의의 가능성이 '시'가 된다. "청소를 하려고 달팽이관 아래 고인/소리들을 닦고 문지른다"(「첫 번째 시」 중)를 읽어보라. 시의 언어는 우리를 명확한 의미의 땅으로 인도하는 징검다리가 아니다. 시적인 문장은 그것을 읽은 우리가 의미로 바로 건너뛰지 못하고 표현 그 자체에 머물도록 만들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는 정확한 의미가 아니라 정확한 표현에서 탄생한다. 그것은 시니피에가 아니라 시니피앙의 예술이다.

다시 강정의 시집으로 돌아오자.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도, 나는 그의 시에서 의미를 읽어낼 수 없다. 그의 기표들은 언뜻 A로 읽히기도, 혹은 B로 읽히기도, 어쩌면 C나 D라고 생각될 수도, 그것도 아니라면 E, 그러나 그 모두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때 의미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A, B, C, D, E … 시를 읽을수록 계속해서 의미가 생성되는 것. 좋은 시가 세월을 타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이리라. 타고난 시인들은 의미 속에 살지 않고 표현 속에 거주한다. 따라서 나는 그의 시가 무엇을 뜻하는지 묻지 않을 것이다. 의미로 건너가려는 우리 발목을 그의 아름다운 표현들이 붙잡을 것이고, 우리는 그 표현 속에 머물면 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그의 시를 해석할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시가 좋다.



07.2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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