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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지러운 진심

#69) 이희중, 『나는 나를 간질일 수 없다』, 문학동네(2017)

by 비평연습


시인의 산문을 읽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나는 어떤 시인의 시를 읽을 때보다 그가 쓴 산문을 읽을 때, 내가 그의 본모습을 보고 있다고 느낀다. 시는 언어로 행하는 실험이다. 하얀 가운을 입고 마스크와 보안경을 착용한 후 무균실로 들어가는 연구원의 모습이, 시인이 시 쓰는 모습을 상상할 때 내가 떠올리곤 하는 장면이다. 그들이 언어의 무균실에서 아직 발견된 적 없는 수사(修辭)를 배양하면 그것이 곧 시가 된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연구실 밖으로 나갈 땐 편한 추리닝 차림이 될 텐데, 산문은 바로 그때 시작된다. 시가 엄숙하고 삼엄한 실험실에서 탄생한다면 산문이란 우리가 자주 가는 카페나 공원의 벤치, 익숙한 산책로 혹은 오랜만에 놀러 간 친구네 집에서 탄생하는 것. 요컨대 시는 비(非)일상의 예술이고 산문은 일상의 예술이다. 따라서 좋아하는 시인이 생겼을 때 나는 그가 산문집을 낸 적이 있나 찾아본다. 그의 실험이 마음에 들었다면, 이제 그가 평소에는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인, 좀 다르다. 그는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 따위가 어디 있느냐는 듯이, 그러니까 산문 쓰듯이 시를 쓰면 안 될 건 또 무엇이냐는 듯이, 쓴다. 시의 세계에 저렇게 편안한 복장으로 들어가는 법도 있는가. 그는 저 엄숙하고 삼엄한 실험실에 청바지에 반팔 티 차림으로 성큼성큼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서 커피 한잔하며 노래를 듣고 한숨 자기도 한다. 그가 시에 있어 진지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진지함의 한 방식이 저렇게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편 읽어 보자.


오십억 년이 지나면 해가 없어질 거라고 한다. 바로 말하자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부풀어올라 아주 큰 붉은 별이 되었다가는 다시 쪼그라들어 아주 작은 흰 별이 된 다음 결국 뜨거운 먼지로 우주에 흩어질 거라고 한다. 설사 지구가 녹아 사라지지 않고 더 뜨겁거나 차가워진 작은 태양을 여전히 돌고 있다 하더라도 그 위에 산 것은 더 없을 거라고 한다. 그 막막한 세월에 나는 없을 것이니 그날을 걱정하는 일은 그야말로 기우라 비웃을 만한데, 나는 벌써 어둡고 답답하다. 그 소식을 들은 후 여러 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

-116면, 「햇볕의 기한」 부분


어려운 말도 없고 난해한 수사도 없다. 그부터가 시를 편안하게 대하기 때문에, 그의 시를 읽는 우리도 함께 편안한 마음이 되고 만다. 마치 일기를 적듯 써 내려간 저 시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하려는 시인들의 그 숱한 고뇌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앞서 말한 대로 시가 언어의 실험실이라면 저마다의 시인들은 각자 아직 존재한 적 없는 문장을 가져야 하는 바, 따라서 그런 관점에서라면 저 시를 좋은 시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시는 실험과 독창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진심의 소산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지 말자. 시 쓰는 일과 발명은 바로 이 점에서 차이가 난다. 내가 저 시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도 언어의 참신함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깃든 진심 때문이었다. 시인이 독창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것과 별개로, 가끔 저렇게 언어가 한 사람의 진심을 보여 준다고 생각될 때, 시는 자못 감동적이다. 아직은 까마득하게 남았을 햇볕의 기한을 저토록 진심 어리게 근심하고 있는 그를, 나는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발명’은 최초가 아닌 경우에는 붙일 수 없는 이름이지만, ‘시’는 최초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최선이기만 하다면 시라고 부를 수 있다. 이희중의 문장들은 분명 최초가 아니다. 시의 언어가 되기에 다소 평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진심이 있고 그 진심에 한해 그의 문장들은 최선이었으므로,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시가 된다. 또한 그 진심이라는 것 덕분에 그의 시가 풍기는 편안하고 안락한 분위기는 연구원의 태만이라기보다 하나의 미덕이라 생각될 수 있는 것 아닐까. 덕분에 그가 청바지에 반팔 티 차림으로 시의 실험실을 드나들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인으로 등단한지 올해로 무려 35년째지만 시집은 세 권뿐이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진심만을 받아 적으려면 속도를 늦추어야 하기 때문이겠다. 어차피 평생 쓸 거라면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느긋하고 편안하게. 다시 말하지만 그에게는 진지함의 한 방식이 저렇게 나타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그의 ‘간지럼론’에 따르면 간지럼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가까운 느낌이 먼저 있어야”(「간지럼론」 중) 가능하다고 한다. 즉 애정이 있어야만 간지럼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나를 간질일 수 없다지만 나를 간지럽힐 시를 읽을 수는 있다. 이제 나는 가장 간지러운 심정으로 그의 네 번째 시집을 기다린다.



07.3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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