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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Sep 20. 2022

대성당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76번째 책)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문학동네(2014)


ㅡ 언제부턴가 ‘차별’이라는 말이 마치 무슨 접미사 같다고 느낀다. 날이 갈수록 이 접미사가 붙을 수 있는 명사는 늘어나고 있다. 지역과 종교, 인종과 장애, 성별과 외모, 빈부와 지위. 그만큼 차별이 많아지고 자연스러워졌다는 뜻일까. 그보다는 차별을 발견하는 우리 눈이 전보다 밝아졌다고 해 두자. 과거엔 없던 차별이 최근 들어 급격하게 생겨났다기보다는, 늘 존재했지만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숨은 차별이 이제는 우리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일 테니 말이다. 요컨대 차별은 어디에나 있고, 많은 경우 숨어 있다. 차별의 운명이 계속 그렇게 잘 숨어 있거나 발각되어 사라지거나 둘 중 하나라면, 차별이 숨어들어 있을 사각지대를 부지런히 수색해야 하는 것은 정의의 운명일 것이다.

ㅡ 최근 읽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대성당」은 차별에 관해 말한다. 차별에 관해 그냥 말할 뿐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발견하고 극복하는지를 보여 준다. 좋은 소설은 좋은 질문을 던진다고 했던가. 그런데 종종 어떤 소설은 좋은 해답을 내놓기 때문에 좋은 소설이 되기도 한다. 「대성당」은 그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한다. 이 소설은 그 자체로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세심한 답변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말하자. 미국의 이 뛰어난 작가는 우리 시대가 정의로운 시대이기 위해서는 먼저 상상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고 전한다. 그는 열렬히 주장하기보다 조용히 제시하는데, 다시 말해 누구도 차별하지 말자고 쉽게 내뱉는 대신, 차별받을 그 누군가를 상상해 보자고 아름답게 제안한다. 고작 열 페이지를 겨우 넘기는 이 짧은 소설이 우리를 얼마나 먼 곳까지 데려가는지, 먼저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ㅡ 어느 날 아내가 오랜 친구 ‘로버트’를 집에 초대한다. 그리하여 한자리에 모이게 된 ‘나’와 아내, 그리고 로버트. 이 즐거운 자리에서 문제가 될 만한 점은 딱 하나, 로버트가 맹인이라는 점이다. 아내와 로버트는 오랜 기간 녹음테이프를 통해 소식을 주고받아 온, 매우 절친한 사이다. 문제는 ‘나’ 쪽인데, 아내와는 달리 ‘나’에게는 맹인 친구가 없고, 맹인이라고 하면 영화에서 본 것들만 겨우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내게는 그의 방문이 달가울 리 없었다. 나로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눈이 멀었다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다.”(287면) 감출 수 없는 어색함으로 셋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한껏 불편함을 드러내던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아내는 피곤하다며 먼저 잠들어버린다. 이제 거실에는 ‘나’와 로버트 둘뿐. 맹인과 단둘이 있을 때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 그는 텔레비전을 켠다. (그야말로 최악의 행동이 아닌가.) 볼 만한 것이 없어 무의미하게 채널을 돌리고 있는데 마침 화면 속에는 교회와 중세에 관한 다큐멘터리. 대성당이다. ‘나’는 맹인에게 이렇게 묻는다. ‘대성당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ㅡ 이어지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당신이 아는 가장 아름다운 결말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로버트는 그에게 대성당이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고 하지만 대성당을 말로 표현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결국 그들은 함께 대성당을 그려 보기로 한다. 우리의 주인공이 펜을 꾹꾹 눌러 종이 위에 대성당을 그려 나가는 동안, 로버트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는다. 그의 형편없는 그림 실력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둘은 대성당이 무엇인지 함께 알아간다. 이윽고 잊을 수 없는 맹인의 마지막 대사. “이제 눈을 감아보게나.”(310면) 이제 그들은 함께 눈을 감고 대성당을 그려 나가기 시작한다.

ㅡ 요컨대 나는 이 이야기의 핵심을 ‘상상’에서 찾는다. 작중 ‘나’의 상상 말이다. 그는 대성당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볼 수 없는 자의 그 ‘볼 수 없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화면에 등장하는 대성당의 버팀도리와 첨탑과 벽화와 이무깃돌을 너무나 당연하게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것을 맹인에게 설명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데, 이것은 그의 언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가 맹인이었던 적 없기 때문에 가깝다. ‘보는 자’의 지위에서 ‘보지 못하는 자’에게 설명해 주는 일은, 그 설명의 수준과는 관계없이 본질적인 몰이해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 둘이 애초에 다른 곳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본질적인 ‘이해’란 둘 중 한 명이 상대방이 될 때만 가능하다. 보지 못하는 자가 볼 수는 없을 테니, 보는 자가 잠시 보지 못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상상이 개입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주인공이 눈을 감고 대성당을 그려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대성당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맹인을 상상한다.

ㅡ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곧 편견의 넓이다. 작품 초반에 우리 주인공이 이를 잘 보여준다. “맹인들은 천천히 움직이고 웃는 법이 없었다.”(287면), “그러니까 맹인이라는 사람이, 상상해보라, 덥수룩하게 턱수염을 기른 모습을! 맹인에다가 턱수염이라니! 어이쿠, 맙소사”(293면), “하지만 그는 지팡이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검은 안경을 쓰지도 않았다. 나는 항상 맹인들에게는 검은 안경이 필수품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사람도 그런 안경을 썼으면 싶었다.”(295면) 숨어 있는 차별이 보이시는지? 이 말들이 지닌 거리감은 그만큼의 부피를 지닌 폭력이 된다. 너와 나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얼마든지 더 큰 폭력이 가능해진다.

ㅡ 그러니 상상력이란 바로 이때 필요한 것이다. 상상력은 나와 타자 간의 거리감을 일축한다. 보는 자가 보지 못하는 자에게 친히 설명해 줄 때가 아니라, 보는 자가 보지 못하는 자를 겨우 상상할 때, 그 둘 사이의 거리는 줄어들 것이다. 후반부에서 작품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주인공의 대사를 보라.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이 있습니까?”(305면) 맹인의 삶을 ‘상상’해 보는 것. 그 상상이 섬세하면 섬세할수록 둘은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정말로 사려 깊은 상상력은 ‘나는 곧 너’라는 궁극의 동일감에 우리가 도달하게끔 만들 수 있다. 그곳에서 너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고 당신의 고통은 곧 우리의 고통이다. 이것이 가능해질 때, 맞잡은 둘의 손에서 비로소 하나의 대성당이 그려질 것이다.

ㅡ 어느 평론가가 쓴 ‘윤리적인 상상력’이란 표현을 나는 기억한다. 어떤 상상이 내가 아니라 타인을 향한 것일 때 그것은 윤리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요지의 표현이었을 텐데, 카버의 「대성당」을 읽으며 나는 이를 ‘정의로운 상상력’이라 바꾸어 말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인공의 상상은 우선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윤리와 접속하지만 더 나아가면 사회적인 차원에서 정의의 문제로 확대될 수 있다. 그가 눈을 감고 펜을 쥐며 온몸을 동원하여 맹인을 상상할 때, 그 상상력은 나와 타인 사이에 그어진 일종의 경계를 넘어서는 원동력이 된다. 문제는 그 경계선이 꼭 시각의 유무로만 그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 가능한 모든 ‘다름’은 잠재적인 경계가 된다. 앞서 말했듯이 ‘차별’ 앞에 붙을 수 있는 모든 말들(지역과 종교, 인종과 장애, 성별과 외모, 빈부와 지위 등)이 그것이다.

ㅡ 하지만 이 치명적인 ‘다름’은 우리의 상상이 만들어낼 동일감으로 상쇄될 것이다. 상상의 세계에서는 ‘나는 곧 너’가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다르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상상할 줄 안다는 사실로써 극복되는 게 아닐까. 「대성당」의 초반부에서 ‘나’에게 맹인은 맹인일 뿐이지, ‘로버트’가 아니다. 맹인에 대해 상상해 본 적 없는 이는 시각 장애라는 벽을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그 벽 너머는 그에게 영원한 미지의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따라서 차별이 있는 곳은 곧 상상이 닿지 않는 곳, 다시 말해 타인에 대한 상상의 사각지대다. 그리고 정의란, 그 상상의 사각지대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다. 그러니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상상력이 정의로운 것은 아닐지언정 모든 정의로운 것은 섬세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ㅡ 집중하게 하는 힘을 집중력이라 하고 창의성을 발휘하게 하는 힘을 창의력이라 한다면, 우리 안에 정의를 실천하게끔 하는 모종의 힘은 ‘정의력’이라 부르면 될까. 그러나 우리가 없는 말을 만들어낼 필요는 없을 텐데, 이미 마땅한 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상상력이다. 다시 말해 상상력이 정의의 충분조건이다. 타인에 대해 상상할 줄 모른다는 것은 세상에 나와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모든 차별과 불공정은 상상력의 부족이 그 원인일지 모른다. 만일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않다면, 그간 우리가 타인을 충분히 상상하지 않았던 건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타인을 상상할 능력도 의지도 잃었을 때 정의는 무너진다.

ㅡ 작은 이야기에서 출발했으나 큰 이야기로 마무리해 보려 한다. 마지막으로 최근 일어난 전쟁에 대해 말해야겠다. 지금까지 적은 대로 말하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폭력은 타인에 대한 상상을 극단적으로 거부한 몇몇 이들이 낳은 결과일 것이다. 확신하건대 그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얼마나 큰 고통을 겪게 될지에 관해 결코 상상해 본 바 없다. 카버 식으로 말하면, 그들은 절대로 맹인이 떠올릴 대성당의 모습을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제외한 모든 곳이 그들에게는 사각지대였을 테니. 그러니 이 전쟁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상상력을 말해야 한다. 상상력 없이는 누구도 스스로 타자가 되어 상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고, 이 전쟁을 일으킨 자들이 결코 갖지 못했을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상상력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0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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