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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Sep 12. 2022

사람은 사람이 키운다.

#75번째 책) 김혜진, 『딸에 대하여』, 민음사(2017)

그녀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다. 자신을 “엄마”라 부르는 생물학적 딸, 그리고 “젠”이라 불리는 자신이 모시는 요양원의 할머니. 그녀는 첫째 딸을 제 몸으로 낳았고 둘째 딸은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낳았다. 그래서일까, 첫째 딸 앞에서 그녀는 마음의 거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둘째 딸 앞에서는 몸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이 두 딸 앞에서 그녀는 엄마가 되는 법을 배운다. 자식을 낳고 학교에 보내고 먹이고 재우는 법이 아니라, 딸이라는 한 인간을 이해하는 법, 함께 살거나 죽어가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딸에 대하여”라는 저 제목은 사실 “딸들에 대하여”가 되어야 맞다. 엄마가 딸을 낳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의 이야기. 이 두 명의 딸들이 한 여성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ㅡ 딸에게도 두 명의 엄마가 있다. 자신을 “딸애”라 부르는 생물학적 엄마와,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 되어 주었던 사랑하는 동성 연인. 첫 번째 엄마는 그녀가 자신의 딸이기 때문에 사랑했지만, 또다른 엄마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엄마가 되었다. “너희가 가족이 될 수 있어? 어떻게 될 수 있어? 너희가 혼인신고를 할 수 있어? 자식을 낳을 수 있어?”(107면) 모든 동성애자들이 평생을 씨름해야 할 저 난폭한 질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사랑, 오직 사랑뿐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란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상대의 어머니도 되어줄 수 있는 자의 마음이다. 그러니 “딸들에 대하여”라는 제목도 사실 틀렸다. “딸들을 사랑하는 어머니들에 대하여”가 맞다.

ㅡ 요컨대 공감과 이해는 상대를 제 ‘딸’로 만들 수 있다. 그 상대가 누구든지, 자신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소외된 자에게 건네는 곡진한 보살핌은 어머니가 딸에게 건네는 보살핌에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누구든지 상대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말과도 같다. 작중 레즈비언인 딸이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하게 해고된 강사들을 위한 집회에 나가는 것, 가족도 찾아오지 않는 요양원의 할머니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며 집에 데려와 살게 하는 ‘나’의 행동. 이런 것들은 이해(利害)관계를 넘어선 이해(理解)의 영역, 말하자면 ‘어머니됨’의 일환이다. 사람은 사람이 키운다. 이 당연한 사실 앞에 우리는 누군가의 어머니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이전에 누군가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0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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