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심보선,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문학동네(2019)
ㅡ 시인 심보선의 첫 산문집. 19년도에 출간된 이 책에서 3년 전의 그가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하고 물었고 3년 후 지금의 나는 아직,이라고 답한다. 30년이 지나 이 책을 다시 펼친다면 어떨까. 그때 그곳의 풍경은 환할까. 혹시 그때도 여전히 아직,이라 대답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는 처음에 이 책의 제목을 "어설프고 서글프고 어색하고 부끄러운"으로 쓰려 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의 제목이 훨씬 좋지만 저 제목이었어도 나는 좋아했을 것 같다. 어떤 글은 단숨에, 또 어떤 글은 곱씹으면서 겨우 읽어 나가는 동안, 나는 자주 어설프고 서글프고 어색하고 부끄러운 심정이 되어야 했다.
ㅡ 그의 글이 보여주는 시대의 슬픔 앞에서 나는 어설펐다. 어설프다는 것은 익숙지 않다는 것인데, 불행에는 절대로 익숙해질 수가 없으므로 지난 몇 년간 우리가 목격해 온 불행들 앞에서 나는 언제나 어설펐다. 특히나 3부에서 그가 세월호 참사나 용산 참사와 같은 주제로 글을 쓸 때, 나는 그 글을 어떤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지 알기 힘들었다. 슬퍼한다면 어설프게 슬퍼하는 일이 되고 공감한다면 어설프게 공감하는 일이 되는 듯했다. 마치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몰라 우스꽝스럽게 엉거주춤하는 아이 같았다.
ㅡ 학부와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그가 명석한 사회학자의 눈으로 사회의 어두운 면을 비춰 보일 때, 나는 서글펐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핵이 있고, 따라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비핵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나는 이 말이 평화주의자의 레토릭이나 시인의 메타포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의 분석으로 들리기를 바란다. 사실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삶이 전쟁터로 바뀐 지 오래라는 것을."(316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비핵화」 중)이라고 썼다. 저 말이 너무 외롭게 들려서, 누군가 나 대신 나서서 반박해 줬으면 싶었다. 누구라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ㅡ 그래서일까, 이토록 냉정한 현실주의자인 그가 '행복'에 관해 말할 때면 나는 어색했다. "사람들은 시의 주요 정서가 슬픔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 시는 진리보다 행복에 더 가까운 것이다."(169면, 「시쓰기는 '말 만들기 놀이'」 중) 그러고 보니 그의 첫 시집 제목이 "슬픔이 없는 십오 초"였던가. 나머지 시간이 전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그에게는 슬픔이 없는 단 십오 초가 있다. 그는 자신을 "끝까지 신랄할 수 없는 사람이며, 사실은 희망하기 위해 비관하는 사람"(158면, 「우정과 애정의 독서」 중)이라고 소개한다. 저렇게 슬픈 사람이 행복을 말한다는 게 어색하긴 해도, 그 어색함은 그로테스크하다기보다는 자못 감동적이다.
ㅡ 마지막으로 그의 글이 사회의 치부와 결함을 정확히 꼬집어낼 때 나는 내 치부와 결함을 꼬집힌 듯 부끄러웠다. 그는 어디가 고장 났는지 사회학자의 눈으로 발견하고 시인의 언어로 지적한다. 그때마다 나 자신이 고장 난 사람은 아니었는가 자주 돌아봐야 했다. 그러니 그의 글을 읽기 전의 나보다 읽고 난 후의 내가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라고 말해도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나에게는 세 가지 수수께끼가 있다. 영혼이라는 수수께끼, 예술이라는 수수께끼, 공동체라는 수수께끼이다. 이 수수께끼는 내 시에도 나오고 논문에도 나오고 산문에도 등장한다. 알려 해도 알 수 없지만 알고 싶은 마음을 그칠 수 없는 인생의 화두들이다. 이 화두들을 붙잡고 죽을 때까지 쓰고 싶다. 나는 여전히 기적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327면, 「후기」 중
ㅡ 저 수수께끼들이 어찌 그 혼자만의 수수께끼이겠는가. 모든 인간 앞에 동일하게 놓인 수수께끼겠지만 누군가는 외면할 때 누군가는 매달린다. 아마 심보선은 그중에서도 가장 간절하게 매달린 사람. 일찍이 우리는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그런 이들을 불러왔다. 예술이 정말 아름다워지는 순간은 마침내 그 수수께끼의 해답을 풀어 냈을 때가 아니라, 저 불가능한 수수께끼에 매달리기를 멈추지 않을 때다. "이 화두들을 붙잡고 죽을 때까지 쓰고 싶다"고 말하는 우리의 시인처럼.
09.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