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시바타 쇼, 『그래도 우리의 나날』, 문학동네(2018)
ㅡ 처음에는 사랑에 관한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소설 속 인물들이 하나같이 불행한 이유가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우리는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을 때 완벽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저런 말은 얼마나 순진한가, 완벽한 사랑이라니. “산다는 건 대체 뭘까?”(142면) 소설에서 한 남자가 던지는 이 난해한 질문에 누구도 아직 제대로 대답한 바 없고,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식의 지나치게 단순하고 손쉬운 답변은, 저 질문의 무게에 비하면 한참 못 미덥다. 진정한 사랑을 찾은 사람들이라고 인생이 쉬울까. 아니, 어떤 사람의 인생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 산다는 게 대체 뭐냐고? 그걸 누가 알고 있을까.
ㅡ “우리 세대는 기대와는 무관하다. 아니, 나는, 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내일 일어날 것을 미리 가르쳐주는 세계에서 자라지 않았다. 내 앞에 있는 것은 계속해서 일어나는 사실뿐이었다. 나는 사실로부터 세계란 무엇인가를 배웠다.”(114면) 60년대 일본의 한 청년이 위와 같이 말할 때, 그가 말하는 “우리 세대”는 지금의 ‘우리 세대’와 얼마나 구별되지 않는가. 스스로도 알 수 없고 누구도 대신 알려주는 이 없는 철저하게 난해한 인생, 그런 세계에서 소설 속 인물들이 자랐고 우리 역시 여전히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 덕분에 인생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어려운 일이다. 삶에서 의미가 발생할 수 있다는 믿음과는 달리, 삶이란 그저 어떤 사실들의 나열에 불과할 뿐일까? 이 역시 알 수 없다. 그걸 누가 알고 있을까.
ㅡ 완벽해 보이는 삶은 많지만 실은 누구도 완벽하게 살 수 없다. 나는 그 사실을 문학을 통해 배웠다. 타인의 삶을 직접 살아보는 불가능한 방법 대신, 소설을 읽는 방식으로 배웠다. 그리고 언제나 훌륭한 소설들은 정답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정답도 없음을 내가 스스로 깨닫도록 만들었다. 소설은 질문을 갖고 들어가 대답을 받아 나오는 문이 아니고, 평범하고 당연한 사실을 갖고 들어가 그것을 질문으로 바꿔오는 곳이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자신과 타인에게 “산다는 건 대체 뭘까?” 집요하게 묻지만 끝내 정답을 찾은 이는 아무도 없다. 대신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실패하고 좌절한다.
그때 그 경찰을 앞에 두고 내가 무엇을 했는지 알아? 그랬다. 난 말이야, 그 경찰을 발로 차버렸어. 고무처럼 탄력 있고 딱딱한 허벅지의 감촉이 지금도 내 오른다리에 되살아나는 것 같아……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 여전히 모르겠어. (…) 그건 그 이상으로는 설명하지 못해. 그 이상 설명하려고 하면 거짓말이 돼버리는 거야, 그런 체험은.
-97면
ㅡ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하지도 않겠다는 저 말이 나는 좋다. 그래서 이 소설은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보여주기를 택했다. 저 인물들의 각기 다른 삶이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똑같이 공허했는가를. 명석하게 진단하고 명확한 답을 내려주는 소설을 우리는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이 '답'을 정해주는 순간, 그것은 작중 '소네'의 말대로 "거짓말이 돼버리"고 말 것이다. 소설은 모든 병이 단번에 낫는 마법의 약을 처방하지 않는다. 소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어디가 아픈지 끊임없이 물어보는 것뿐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일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소설은 사실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목소리다. 그리고 그 진실이란, 언제나 평서문이 아니라 의문문으로만 나타날 것이다.
08.3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