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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Oct 29. 2022

밤을 살고 있는 당신께.

#81번째 책) 최은영, 『밝은 밤』, 문학동네(2021)


ㅡ 언젠가 1960년대에 제작된 21세기 상상도를 본 적 있다. 그 오래된 포스터 속 지금의 인류는 캡슐 한 알로 하루 모든 영양분을 섭취하며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 수학여행을 떠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발랄한 상상력인가. 그래도 당시의 기대가 전부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꿈꾸었던 무인 자동차나 소형 텔레비전은 자율주행과 스마트폰으로 정말 실현되지 않았나. 그러니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말하자면 그 포스터는 우리에게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사실을 알려 주는 셈이다. 과거에 비해 현재가 분명 달라졌다는 사실, 그러나 기대했던 것만큼 많이 달라진 건 아니라는 사실.

ㅡ 아쉬운 것은 그 포스터가 과학적 발전의 산물만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들이 21세기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상상했던 것처럼, 21세기 사회 모습의 상상도를 그렸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가 적혔을 것이다. “여성도 교육받는 시대!” 혹은 “모든 인간이 차별받지 않는 시대!” 그랬다면 이 역시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말해야 한다. 앞에서와 마찬가지 이야기를 다시 꺼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가 과거에 비해 분명 달라지긴 했으나, 기대했던 것만큼 많이 달라진 건 아니라고.

ㅡ 소설에서 ‘지연’은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상 바뀌었어, 엄마. 엄마 살던 때랑 지금이 같다고 생각하지 마.”(16면) 딸의 저 말이 엄마는 안타깝다. 세상이 실은 조금도 달라진 적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혼한 여자에게 주어지는 사회의 시선, 그건 정말 바뀌었나? 소설은 증조할머니에서부터 세 세대를 걸쳐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상이 얼마나 ‘덜’ 변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혼한 여자는 왜 온갖 편견과 싸워야 하나. 그 편견 앞에서 세상이 덜 변했다는 사실은 아쉬워할 일이 아니다. 더 변하지 못했음을 한탄해야 할 일이다.

ㅡ 희령에 내려와 이십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할머니를 통해, 지연은 과거의 여자들과 만난다. 고조모-증조모-할머니-엄마-나로 이어지는 장구한 역사에 그녀를 끌어들인 것은, 다름 아닌 사진 한 장, 자신과 너무도 닮은 증조할머니의 사진이었다. “너라고 해도 다들 믿을 것 같아.”(30면) 수십 년을 사이에 둔 두 여자가 그토록 닮았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세상의 눈에는 두 여자가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남자 있는 여자라야 사람들이 함부로 못해.”(16면) 세상은 이 말을 60년대의 여성에게도 했고, 2000년대의 여성에게도 한다. “하나하나 맞서면서 살 수는 없어, 지연아. 그냥 피하면 돼. 그게 지혜로운 거야.”(278면) 이 말 역시 세상이 60년대의 여성에게도 했고, 2000년대의 여성에게도 하고 있는 말이다.

ㅡ 그러니 증조모와 할머니가 살아온 삶은 지연에게 과거가 아니다. 과거일 수 없다. 그것은 차라리 소름 끼치도록 생생한 현재가 아닌가. 중혼의 희생자가 되어 홀로 자식을 키웠던 할머니의 삶은 바람난 남편과의 이혼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지연의 삶과 비정하게 닮아 있다. “그는 끝까지 할머니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았다.”(229면) 할머니는 사과받지 못했다. 지연도 사과받지 못했다. 소설 밖에서도 한 번도 사과받은 적 없는 이들이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 사과받지 못한 채로 살고 있을 것이다. 다시 묻자, 과연 세상은 충분히 변했나. 지금 우리 사회는 60년대에 고통받던 이들이 간절하게 상상했던 미래의 모습을 얼마나 실현시켰나. 할머니의 삶이 지연에게 과거가 아니듯이, 지연의 삶도 할머니에게 미래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ㅡ ‘민주주의의 새벽’이라는 표현이 있다. 독재의 밤이 가고 민주주의의 해가 떴다는 의미에서 사용되는 관용적인 표현일 텐데,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에 아직도 해가 뜨지 않은 장소는 너무 많아 보인다. 소설 속의 여성들은 여전히 밤을 살고 있다. “씨발. 이혼이 자랑이야? 니가 뭐 잘난 게 있다고 어른을 가르치려고 들어?”(275면) 이런 말을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들어야 하는 삶이 캄캄한 밤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겠는가. 그저 소설일 뿐이라고? 그러나 소설보다 뉴스가 더 허구 같을 때가 많다. 소설 밖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독한 밤을 살고 있을까 헤아려야 한다. 이제 우리는 ‘여성인권의 새벽’을 기다린다.

ㅡ 최근 읽은 한 시인의 산문집 제목은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였는데, 저 제목이 소설 <밝은 밤>에 더 잘 어울렸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증조할머니가 딸에게 묻는다,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그러자 할머니는 아직,이라 답한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도 딸에게 묻는다,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그러자 엄마도 아직,이라 답한다….. 언젠가 우리도 다음 세대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그곳의 세상은 살 만한가, 성별로 소외받지 않고 누구도 부당하게 상처받지 않는가, 그때는? 그렇다, 라고 대답할 수 있는 날이야말로 진정한 미래일 것이다. 60년대 사람들이 그랬듯이 지금의 우리도 그런 미래의 상상도를 그려야 한다. 언젠가는 현실이 될 상상을. 그래야만 지금 살고 있는 밤이 밝아진다.



10.2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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