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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Dec 11. 2022

진실이 사실을 능가할 때

#84) 마크 헤이머, 『두더지 잡기』, 카라칼(2021)


ㅡ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 요컨대 사실이 논리의 영역이라면 진실은 윤리의 영역이다. 나는 영화를 보며 그것을 배웠다. 가령 영화 속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우리가 경찰에 신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화는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 속 비참한 죽음 앞에 누구든 경건해지거나 슬퍼할 필요는 있는데, 그 장면이 어떤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다시 말해 그 이야기가 사실은 아니라고 해도, 거기에는 분명 삶과 죽음에 관한 일말의 진실이 포함되어 있다. 한 편의 영화가 아름다워지는 순간이 바로 이때다. 사실이 아니라 진실을 말할 때. 그때 우리는 그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사실과 결별하고 진실과 대면하는 극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ㅡ 영국에는 전문 “두더지 사냥꾼”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영국 제도에 두더지 사냥꾼이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54년 무렵이었다.”(248면) 정원을 훼손하는 두더지를 잡는 일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사람들. 그중 한 명의 증언을 읽으며 우리는 그동안 몰랐던 한 가지 ‘사실’과 만난다. “나는 돈 때문에 두더지를 잡는다.”(49면), “나는 그에게 죽은 두더지 몇 마리를 보여주고, 열세 마리에 대한 값을 청구한다.”(256면) 이것은 한 두더지 사냥꾼의 입에서 튀어나온 ‘사실’들이다. 돈을 벌기 위해 두더지를 죽여야 하고, 많이 죽일수록 수입이 늘어난다는 냉혹한 사실. 그런데 그는 이런 말도 한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최고의, 그리고 가장 인도적인 두더지 사냥꾼이 되길 바랐다.”(47면)

ㅡ “인도적”인 두더지 사냥꾼? 이 모순적인 말속에 진실이 있다. 이 노년의 두더지 사냥꾼은 생명을 죽일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지만 생계 유지를 위해 그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과 ‘그러려면 두더지를 죽여야 한다’는 또 다른 사실, 이 두 가지 사실이 충돌하는 곳에서 그는 괴로워한다. 그리고 그 괴로움은 질문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강한 인간이 약한 두더지를 잡는 것은 자연의 순리인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까? 그런데 인간은 (살생이라는) 비인간적인 방식으로도 과연 인간답게 살 수 있나?……

ㅡ 바로 저 질문들이 인간 삶에 관한 진실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 저 질문들에 대한 완벽한 대답을 진실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마땅히 대답하기 곤란한 저 어려운 질문들 앞에서 최선의 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 그것을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마 “인도적인 두더지 사냥꾼”이란 이상한 말도 저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 한 남자가 고군분투한 흔적이겠다. 그가 ‘나는 두더지 사냥꾼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일견 ‘사실’에 불과하지만, 그가 ‘인도적인 두더지 사냥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질문하고 고민하는 순간, 그는 우리 삶의 중요한 ‘진실’ 하나를 들춰내게 되는 것이다.

ㅡ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실은 논리의 일이고 진실은 윤리의 일이다. 다르게 말해 볼까. 사실은 우리 앞에 평서문으로 나타나지만 진실은 의문문으로 나타난다. 책 속에서 그 둘을 구별해 보자. “이어서 또 다른 곳에서 덫을 설치한다. 나는 두더지를 덫으로 포위하려고 애쓰는 중이다.”(220면) 이 냉혹한 문장이 가리키는 바는 두말할 것도 없이 ‘사실’이다. 덫을 잘 놓아 두더지를 많이 잡아야 돈을 벌 수 있다는 차가운 사실. 반면 ‘진실’은 다음과 같은 문장 속에 들어 있다. “나는 두더지를 죽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지 궁금했다.”(45면) 윤리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질문하는 자에게만 진실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ㅡ 팀 버튼 감독 영화 『빅 피쉬』(2003)는 사실과 진실이 다를 뿐 아니라 진실이 사실을 능가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 속 아버지는 놀라운 이야기꾼이다. (“자동차만 한 거대한 물고기가 내 반지를 물어 갔어!”) 그러나 성인이 된 아들은 더 이상 저런 환상적인 이야기가 즐겁지 않다. 그는 차라리 ‘사실’이 알고 싶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아버지의 모습을. 그러나 아버지의 이야기는 모든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할 만한 그저 그런 과장된 모험담이 아니었다. 그는 그 이야기 속에서 진정으로 행복했기 때문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이것이다. 그의 인생을 행복하고 살 만한 것으로 만들었다면,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가 과연 그렇게 중요한가?

ㅡ 요컨대 영화 속 아들과 아버지의 갈등은 한 사람이 사실(fact)을 요구할 때 다른 한 사람은 진실(true)만을 말했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임종을 앞둔 순간까지도 아버지는 끝내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끝까지 이야기를 계속한다. (“수백만 마리 파리가 내 차에 달라붙더니 글쎄 차를 들어 올려버렸다니까!”) 그러나 그 거짓 이야기가 그를 행복하게 살게 했고 끝내 행복하게 죽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니 그 이야기들은 아버지에게 사실은 아니었을지언정 진실의 한 형태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 진실 앞에, 이제 사실은 무의미해진다. 이 놀라운 영화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아마도 이것이 아닐까. 진실은 종종 사실을 무기력하게 만들면서 그것을 극복한다는 것.

ㅡ 마크 헤이머는 저 『빅 피쉬』 속 아버지를 닮았다. 그가 발견한 진실은 사실을 얼마나 멋지게 능가하는가. 그는 두더지 사냥을 그만둘 것이고 그만큼 그의 수입은 줄어들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무력하게 하는 힘은 그가 보호하려는 진실에서 온다. 생명을 해치지 않고 자연을 ‘자연’스러운 상태 그대로 놔두어야 한다는 진실, 그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며 모든 인간에게는 그런 삶을 선택할 의지도 능력도 있다는 진실. 그 진실은 ‘인간은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ㅡ 저자는 말한다. “나는 딱딱하고 차가운 감옥과도 같은 사실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들은 당신을 자유롭게 해주지 않는다. (…) 그럴 때마다 나는 ‘진실’의 한 형태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19~20면) 우리는 사실들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사실들이란, 가령 이런 것이다. ‘덫을 이용하면 손쉽게 두더지를 잡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저자의 말에 따르면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는 ‘진실’은 어디에 있나. “인도적”인 두더지 사냥꾼이 될 순 없을까, 하는 고민 속에, 더 나아가 두더지를 죽이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고민 속에 있다.

ㅡ 사실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인간은 진실을 작동시키며 살아간다. 삶의 여러 진실 중 한 가지를, 이 책이 내게 알려 줬다. 이제 나는 ‘인간은 두더지를 죽일 수 있다’는 무던한 ‘사실’ 속에서 ‘두더지를 죽이고 싶지 않은 인간이 있다’는 ‘진실’을 발견한다. 사실에 갇혀 사는 삶과 진실을 찾아 떠나는 삶이 있다면, 이 남자가 다시는 두더지를 사냥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은 그의 삶이 진실을 좇는 자유로운 삶이라는 방증일 것이다. 그런 삶이야말로 정말 ‘영화 같은’ 삶이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사실과 진실의 예를 하나만 더 들며 마친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 이 말은 사실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진실에 속한다.



1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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