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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 이도 Jun 10. 2021

전고운 감독의 <내게 사랑은 너무 써> 2008

첫 연애, 첫경험, 그 시작에서.

*이 리뷰는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 있는 폭력적인 장면에 대한 묘사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09년 제1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아시아 단편경쟁 우수상을 수상을 시작으로 장편 <소공녀>로 대종상 신인감독상,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 부일영화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하고 자신의 색을 뚜렷하게 그리며 많은 팬덤을 만들고 있는 전고운 감독의 초기 단편작 <내게 사랑은 너무 써>. 이 영화는 도로와 도로 경계에 피어있는 개망초, 들려오는 매미소리로 느껴지는 초여름 날 고시원 앞에 서있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목련으로 시작한다. 남들 눈(사회의 시선)을 피해 첫 섹스를 하고 관계를 깊이 만드는 과정에 있는 여학생 목련과 남학생 병희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목련은 병희가 잠시 나간 사이 옆방 성인 남성에게 강간을 당한다. 전고운 감독의 <내게 사랑은 너무 써>가 많은 호평을 받는 동시에 강간 당하는 장면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이유와 그럼에도 감독이 그 장면을 그렇게 연출한 이유가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과 둘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고 싶은 것은 사랑을 해본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욕망이다. 영화의 목련이와 병희도 둘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기 위하여 고시원에 들어가기까지 성공을 하지만 목련이가 강간을 당하고 병희는 그런 목련이를 뒤로 한 채 자리를 떠난다. 그렇게 관계에는 금이 간다. 하지만 영화는 이 목련의 탓도, 병희의 탓도 하지 않는다. 어느 한쪽에만 이입 시키지 않는다. 고시원 앞 또래 학생들이 지나갈 때 몸을 숨기고 엄마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아 거짓말을 하여 순결하기를 강요하는 사회로부터 받은 폭력을 통해 목련이의 행동이 어쩔 수 없었음에 타당성을 부여하고 남성들 사이에서 폭력이라는 상처로 남눈 서열이 병희로 하여금 두려움을 만들어낸다. 카메라 앵글에 비춰진 팔뚝의 상처는 남학생의 고백에 선행하며 병희 주변을 맴도는, 우위의 남성에게 쉽게 대항하기 어렵게 만드는, 트라우마로 목련이가 강간을 당하는 데에 일조하게 된다. 영화는 둘의 감정적 교류, 목련이의 사정, 병희의 사정을 모두 보여주지만 옆 방 가해자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병희의 탓만을 하고있지않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공간을 통해 목련의 움직임 변화를 보여준다. 고시원 밖 건물을 둘러싸던 목련이가 본인은 원하지만 엄마(사회)에게는 드러낼 수 없는 행동을 시작하고는 줄곧 침대라는 사각 프레임. 그리고 강간을 당한 후에는 의자라는 움직임이 최소화된 공간으로 목련이의 성적 실천이 목련이의 움직임을 어떻게 축소시켰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여성의 성적 실천이 여성을 어떻게 위축시켜버리는지로 병치시켜 해석할 수 있다.


    성적 폭력을 영화에서 다루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들이 있다. 그중 큰 맥락을 정립하고 그것이 어떻게 영화에서 작용하였는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첫째, 보여주는 것만으로 폭력이 되는가. 여성을 약자로 하는 성을 둘러싼 문제들이 대두되고 더 많고 다양한  여성들이 미디어에 등장 할수록 지금까지 남성에 의해 구축된 미디어 속 남성적 영상언어에서 여성을 어떻게 그려내는지는 연출자에게도, 관객에게도 아직은 구축해가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둘째,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으면 성적 폭력을 묘사할 수 있을까. 더 중요한 것은 장면 자체보다 그 장면을 다루는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사랑은 너무 써>에서 강간 장면은 꽤나 적나라한 장면이지만 목련이의 감정적 교류와 사회적 억압, 병희의 남성 간의 서열에 따른 트라우마를 잘 구축해낸 덕분에 목련이의 강간 장면은 단순 쾌락 혹은 스펙터클로 끝나지 않는다.

    많은 여성이 그 장면을 마주하는 데에 어려운 것은 성적 감수성 덕분만은 아닐 것이다. 성을 다루며 여러 방면에서 호평을 받았던 넷플릭스의 드라마 <오티스의 비밀상담소(Sex Education)>의 한 에피소드에서는 담임 선생님이 사이가 좋지 않아 문제를 만든 여학생들을 벌하려 모아두고 이들에게 ‘공통점 찾기’라는 과제를 준다. 결론적으로 이들이 찾은 공통점은 ‘성폭행 당한 경험’이었다. 그만큼 성폭력은 많은 여성들이 겪었고 그만큼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글을 쓰기로 마음먹기까지 가장 어려운 건 마주하기였다. 강간 문화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흐린 눈으로 보내온 날들과 등장을 미리 인지했던 강간 장면을 보고 있을 수 있을까라는 약간의 두려움.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전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해보아야한다. 감독 또한 그것이 어찌되었든 수면 위로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시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고통을 꺼내보게 만드는 트리거 전에, 그 고통을 만들게 한 원인인 영화에서 이야기하고자하는 구조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문제는 흐린 눈으로 지나쳐 묵인했던 순간들로 하여금 나를 목련이인 동시에 병희로 만들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병희의 선택과 목련이의 빗금을 동그라미로 만드는 데에는 의견들이 분분하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본인의 입장을 고려해 묵인한 , 목련의 남자친구로서 병희의 방치는 방조가 되어버린 것은 부정할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는 병희를 탓하기만 하지않고 목련이가 강간 당할  밖에 없는 ‘강간 문화의 구조 보여주기에  행동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목련(여성) 감정적 흐름을 보여줬다는 것과 이제  서로를 더욱 이해하려는 커플로 하여금 이들을 둘러싼 사회적 구조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한다. 또한 단순히  쪽의 성을 가해자로 두지 않고  맥락을 차분히 그려냈기에 장면들은 설득력을 갖는다. ‘내게 사랑은 너무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하기에 미숙한 여성과 남성이 놓인 환경은 너무 쓰기만 하다. 이들의 서로를 배려했던 순수한 마음은  둘의 관계에서 그어진 금은 목련이의 반쪽짜리 동그라미가 된다. 반쪽짜리 동그라미로 고쳐 맞은 답이 되었다 한들, 종이에는 빗금이 그어져있는 것처럼 목련이의 삶에서도 지나갈  있는 문제가 되었다 해고 빗금은 남아 있으리라. 목련이가 당당하게 이야기할  있었다면 처음부터 빗금을 그어야 하는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어디선가 이런 빗금을 동그라미로 만들려는 많은 이들의 노력이 행해지고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퍼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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