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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 이도 Jul 16. 2021

같은 반 친구의 죽음 마지막 순간을 증명해야한다.

가시화된 고통에 대하여 <죄 많은 소녀>

***리뷰 자체가 결말에 대해 강력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해주세요.




    2017, 22 부산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부산영화평론가상,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대종상, 씨네 21 영화상  다수의 국내 영화제를 휩쓸며 화려한 데뷔를  < 많은 소녀> 김의석 감독뿐만 아니라 전여빈 배우를 이제훈, 변요한, 박정민 배우와 같이 단편영화계서부터 탄탄한 연기력을 인정받아온 배우로 관객들에게 얼굴을 알린다. 당시 ‘지금까지 여성의 생리(생리대)하는 장면을 보여준 영화는 없었다라는 돋보이는 연출부터 서영화, 유재명, 정인기, 이태경, 전소 배우  지금 보면 내로라하는 연기파 배우의 총출동까지 다양한 부분에서 화제가 되었다. 당시에도  화제였지만 5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현대 사회에 적용되는 문제를 가지고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관계에 대하여,

    영화는 같은 반 친구인 ‘경민(전소니 분)’의 죽음으로 마지막 순간을 함께했던 ‘영희(전여빈 분)’의 결백을 증명해야하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되면 영희가 해야 할 일은 첫째로 ‘경민과의 관계'를 증명하는 일이다. 과연 둘은 친구이긴 한 것일까. 영화는 가장 처음으로 화장품 가게의 직원에게 경민을 고발하는 듯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때 영희의 표정에서 의도적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고발이 경민을 괴롭히기 위한 의도인지, 화장품을 훔치기 위한 계획의 일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지하철 역에서 다시 만나는 둘. 관계란 그런 것이다. 같은 행동을 해도 당사자들 외에 남들은 절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언어인 셈이다. 두번째, 그날에 있었던 일을 증명해야 한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해야 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는 한 세세하게 기억하는 편이 더 이상한 진술들을 해야한다는 것은 영희에게 너무나 괴로운 일이다. 친구의 죽음이라 해도 괴로울 일을 영희는 모든 어른들의 의심을 받는 피해자로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일은 한 사람을 또다시 피해자로 만드는 것임을 영화에서 또렷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옅게나마 보여주고 있다. 친구라면 어떤 사이의 친구인지를 증명하는 것, 아니라면 그런 관계를 증명해내야하는 것이 누군가의 죽음 뒤에 숙제처럼 남겨진다. '어떤 사이'라는 물음은 증명이나 가능한 문제인지 딜레마에 빠트린다.


권리에 대하여,

    영희가 경민이의 죽음에 관련이 되어있는 것 같다는 한솔(고원희 분)의 말에 평소 친하지도 않아보이던 같은 반 유리(이태경 분)는 무리를 데리고 영희를 찾아가 응징을 한다. 그랬던 유리가 영희의 무죄에 무게가 실리자 한솔을 찾아가 또다시 응징 아닌 응징을 시도한다. 사건의 최전선에 있는 당사자들을 제외한 영희네 반 친구들은 이미 터져버린 불명한 사건을 보는 대중들의 모습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에 분명한 가해가 있었을 것, 그 가해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가  그들에게 응징으로 심판할 수 있을까. 그들의 권리에 대해 생각해볼 때쯤 경민의 죽음에 영희가 무관함이 인정된 뒤에도 병원에 있는 영희를 찾아오며 ‘이 정도 권리는 있잖아요'라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말을 영희와 영희 아버지에게 쏘아붙인다. 한 사건으로 인한 가해자든 피해자든 이들을 비난할 권리에 더불어 동정할 권리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게 된다.


소통에 대하여

    영화는 영희가 독극물로 보이는 액체를 마시고 목소리를 잃으면서 끝을 향해 달려간다. 동시에 영희의 소통 능력  하나인 발화 능력을 상실할  영희의 외침이 사람들에게 닿게 된다. 하지만 그런 영희의 병실을 직접 호흡기를 이용해 만든 풍선에는 영희의 호흡기능 상실을 비웃기라도 하는  아무런 배려가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영희의 주장이 주변 인물들에게 닿았다한들 진정한 소통이 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영희는 영화 전반부에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는 고통을 액체를 마심으로써 비가시적 고통을 가시화시킨다. 어른들은 자기 몫만 챙기다가 보이는 고통과 보이지 않는 고통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가시화된 고통은 인정을 받는다. 가시화된 고통을  후에야 사람들은 이해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공기와 소리를 뱉을  있는 기능을 상실한 대상을 진심으로 이해했다면 풍선이 아닌 많고 많은 다른 방법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례식장에서 유가족의 곡소리와 액체를 마시고 고통스러워하는 영희에 대한 감독의 절제된 사운드 처리는 영화의 전체적인 톤을 과하지 않게 만들면서도 들리는 소리와 들리지 않는 소리에 대해 집중해보게끔 만든다.


    결과적으로 영희가 진짜 발언을 하려는 순간, 어른들은 듣지 않고 영희가 목소리를 잃을 때 그녀의 무죄는 증명되는 것처럼 보인다. ‘한 여학생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라고 하면 수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다. 그 죽음을 받아들여야하는 부모의 딜레마, 그 학생이 죽음을 결심한 친구 혹은 학생으로서의 스트레스 등 많은 이야기가 있음에도 감독은 이들을 모두 아우르는 이야기를 한다. 영화는 경민이의 죽음을 두고 영희를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영희의 명확하게 보이는 시점샷(Point Of View)은 병실에 누워있을 때 한 번이다. 이러한 연출 덕분에 영화는 영희를 따라가지만 영화를 2차, 3차 볼수록 또 다른 인물의 시선에서 감상이 가능하게 된다.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은 ‘After my death(나의 죽음 뒤에)’이다. ‘죄 많은 소녀'로 의심과 함께 시작해 누군가의 죽음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갈등을 남기는 <죄 많은 소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논리 하에 새로 탄생되는 피해자를 보며 불명한 일들에 마주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한다. 이 이야기가 와닿을 수 있는 데에는 배우들의 연기력뿐만 아니라 줄곧 관객의 관심을 이끄는 방식의 연출과 인물들을 섬세하게 비추는 빛, 절제된 사운드 덕분인 것이 분명하다. 5년이 긴 시간이라면 길겠지만 지금 봐도 탄탄한 연출과 스토리라인은 근 몇 년 간 신인 감독들의 지향점인 '세련된' 영화이다.


*사진출처: 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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