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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 이도 Oct 25. 2021

우리가 사랑하는 무대의 표리 <아네트>, 2021

레오 카락스, 아담 드라이버, 마리옹 꼬띠아르의 <아네트> 시사회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부에는 주로 감독과 전작을 다룹니다. 2부부터 보셔도 됩니다.


<1부-레오 카락스>


 우린 누구였나? 누구였나?

과거의 우리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우린 어떤 모습일까

다른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그때 그 느낌이 느껴져

묘한 그 감정…


아이가 하나 있었네

아주 어린아이가

우리에게 아이가 있었어

아이의 이름도 불렀고

그런데 그 아이는…


우린 떠나야만 했지

아주 멀리 헤어져야 했어

연인들은 흉한 모습으로 변했고

서로 멀어지기를 바랐지

새로운 시작

죽은 자는 떠나고

산 자는 살아가지


우린 누구였나? 우린 누구였나?

과거의 우리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우린 어떤 모습일까

다른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새로운 시작

죽은 자는 떠나고 산 자는 살아가지


-영화 <홀리 모터스>, 2012 노래 중


    까락스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고 그의 전 여자친구는 연기를 하는 배우였다. 두 사람 모두 예술을 창조하는 창작자이다. 그들이 만든 아이는 바로 그들이 만든 예술품이다. 노래가 아이의 죽음을 암시하듯 아이의 죽음은 완성되지 못한 예술품의 끝이지만 <아네트>는 ‘아네트'를 통해 그 연장선을 보여준다. 또한, ‘안'은 까락스의 전 여자친구 ‘예카테리나 고루베'의 은유로 비춰진다. 고루베는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다가 2011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했다. ‘아네트'는 <홀리 모터스>의 노래에 연이어 연장선을 떠올려볼 수 있다.

    2013년 국내 개봉한 <홀리 모터스> 이후 8년 만의 영화다. 그 전작 <폴라 X>가 13년 만에 연출한 작품임을 유념할 때 이번에도 감독은 꽤나 긴 공백기를 가지고 작품을 선보였다. <폴라 X>와 <홀리 모터스>로 감독이 영화에 있어서 아날로그 필름의 20세기와 디지털 시네마가 된 21세기의 급변하는 세상에 어떻게 적응했는지를 보였다. 이 당시 스스로 이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였다고 말한 감독의 고뇌가 돋보이는 작품이 전작 <홀리 모터스>였다.  기술뿐만 아니라 이전까지의 영화들과도 달랐다. 데뷔작 <소년, 소녀를 만나다>부터 <나쁜 피>, <퐁네프의 연인들>, <폴라 X>까지 주로 청춘남녀들의 삶과 사랑을 이야기 한, 내러티브를 중심의 20세기 필름 영화에서 21세기 디지털 영화 <홀리 모터스>, <아네트>는 레오 까락스의 새로운 방향인 셈이다. 영화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에 관한 감독의 성찰이 담긴 <홀리 모터스>가 ‘영화에 대한 영화'라면, <아네트>에서는 과연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까락스 본인이 잠에서 깨어나 침실에서 걸어 나와 벽을 부수고 들어간 극장에서 시작했다면, <아네트>는 길 위의 소리(음파)와 함께 사운드를 조정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치 영화에 대한 영화를 시작하겠다고 열었던 <홀리 모터스>와 음악을 조율하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지는 첫 장면으로 시작한다.




<2부-아네트>

내가 그녀한테 반한 건 분명한데

그녀가 내게 반한 건

그건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네트>는 유능하고 인기 있는 할리우드의 한 예술가 커플의 사랑 이야기로 시작한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는 유명 오페라 가수 안에게 분명하게 반해 연애를 하면서도 안이 자신을 만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의아해한다. 그럼에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이 커플은 아네트라는 딸을 가지게 되지만, 그로 인해 둘의 생활에 균열의 시작임은 미처 알지 못한 터였다. 갈등을 좁히고자 가진 요트 여행에선 앞을 볼 수 없는 거친 파도 앞에, 한 예술가 커플의 연애 스토리는 신이 만든 인간이라는 유인원의 열등감과 욕망을 드러내는 군상으로 변모한다.

    오늘 쇼 어땠냐는 질문에 헨리는 ‘관객들을 죽여줬지’라고, 안은 ‘난 그들을 구해줬어'라고 말한다. 헨리는 무대에서 관객들을 ‘죽이기'위해 때로는 죽는 시늉도 한다. 하지만 무대에서의 총을 맞는 연기를 해도 그 죽음은 웃음거리가 된다. 이를 보여주는 감독의 시선조차 아무도 없는 무대에 헨리 혼자 덩그러니 놓여 초라하게 보여준다. 반면 안의 죽음은 조명받는 무대 위 숭고한 행위로 모두를 감동시킨다. 같은 ‘무대’라는 곳에 서서 관객들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거나 발화를 하지만, 일제히 무대를 보고만 있는 제의적 형식의 오페라 관객들과 다르게 헨리의 관객들은 때로는 노래를 주고받으며 즉각적인 리액션으로 소통하는 형식이다. 본인들의 죽음으로 관객을 죽여주는 헨리와 관객을 구원하는 안의 무대는 같은 역할임에도 분명히 달랐다. 사람은 누구나 개별적인 제각기 다른 존재임에도 헨리에게 이러한 괴리는 열등감으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오토바이에 안을 태우고 멋지게 질주하던 헨리의 모습은 어느새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뀐다. 분명한 건 안은 그런 헨리에게 불안함 또는 불만을 갖지 않는다. 그럼에도 헨리는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안에게 사랑받는 이유를 찾고자 했던 헨리는 그 인정의 욕구를 본인이 아닌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고 그 욕망은 결국 헨리를 높이는 것이 아닌 안을 추락시키려는 잘못된 목적지에 닿는다. 여기서 정신 차리지 못하고 아네트의 능력을 보자마자 ‘아동착취'라는 문제 제기에도 자신의 어린 딸을 관객 앞에 세우는 파렴치한 인간이 된다. 점점 더 자기 파멸적인 행동에 이르게 된 헨리는, 아네트를 함께 이용하는 동업자였던 지휘자마저 한 여자를 두고 경쟁자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를 제거한다. 지휘자를 죽인 후에는 범인으로 검거가 되는 ‘벌’을 받지만 안을 죽인 죗값은 없으며 아네트를 착취한 벌은 아네트로부터의 ‘외면’이다. 하지만 이미 ‘사랑'을 모르는 자에게 사랑하는 이로부터의 버려짐이 과연 얼마나 큰 벌일까 라는 의문이 든다. 사과를 먹는 안을 보고 있자면 백설공주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안의 욕망과 생각은 드러나지 않는 존재로 온전히 헨리의 입장에서 그려진다고 볼 수 있다. 차 안에서 불타는 산에 대한 속보를 보다가 잠들었을 때 현실인지 꿈인지 불명확한 장면들 속에 과거 구설수에 오른 헨리로 인해 염려하는 안의 모습은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장면에 대해 안이 죽은 후 지휘자에게 아네트를 맡기고 나갔던 헨리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더 많은 감각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종종 등장하는 연예 뉴스 장면 또한 이들에 대해 끊임없는 논쟁거리로 만든다. 죽든 말든 뭘 하든 소비되며 인기를 등에 업고 소위 신분 상승을 노리는 예술의 위치, 예술가에 대한 가십, 연인에 대한  의심, 현실과 맞닿은 문제들을 음악이라는 레오 카락스의 무대를 통해 보여준다.

   ‘신의 유인원'이란 결국 신이 만든 찌질하고 나약한 인간을 보여준다. 왜 자신을 사랑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의문에서 비롯된 열등감, 본인을 의심하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를 의심하던 남성은 결국 몰락한다. 과연 헨리는 한 남편으로서 안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것일까 헨리라는 인간으로서 인정받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의 인트로 곡 ‘So may we start’는 마치 감독이 ‘이 현실을 보여줘도 되는 걸까요’라며 묻는 것 같다. 남성의 성장과 깨달음에는 여성 혹은 아이라는 약자의 존재가 언제까지 필요할지 모르겠다. 신의 유인원의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기엔 효과적이지만 다음 세대의 감독들에게는 다른 시각을 제공하는 능력을 기대해보고 싶다. 그럼에도 어떤 삶에 대한 교훈이나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며 답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감독의 이런저런 생각들을 보여주는 감독의 매력이 잘 드러난 것은 분명한 작품이다. 무대를 마주하는 관객, 영화라는 매체를 이용해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로서 고민이 고스란히 서려있는 작품이다.


*사진출처 하이, 스트레인저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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