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묵칼레에서 마니사까지
아침 식사 전, 호텔 주변을 산책하자 하늘에 열기구 몇 대가 조용히 떠 있다. 며칠 전 카파도키아에서 열기구를 놓친 아쉬움이 스쳤지만, 숫자가 적어도 풍경은 충분히 아름답다. 여행은 늘 보고 싶은 것보다 이동하는 시간이 더 길다. 오늘도 오전엔 쉬린제와 에페소를 들렀다가 오후엔 마니사까지 달려야 하니, 여섯 시간 가까이 버스에서 보내게 되는 날이다.
세 시간을 달려 도착한 쉬린제는 원래 그리스인이 살던 산자락의 작은 마을이다. 인구 교환 정책으로 그리스인은 떠나고, 그 자리를 튀르키예 사람들이 채웠다고 한다. 첫 방문지는 특산 와인 시음장이다. 네 가지 과실 와인을 맛보고 건물을 나오는데, 1900년대 초 그리스 학교로 쓰였던 돌 건물이 식당 겸 와인하우스로 변해 있다. 마당 한편에서는 모래 위에서 커피를 끓이는 여인이 있는데, “쓰리 유로”라는 말과 함께 주전자를 모래 위에서 천천히 돌렸다. 주전자에서 피어오르는 커피 향은, 여행길에서 잠시 멈춰 숨을 돌리는 시간을 선물했다.
마을을 둘러본 뒤 버스로 돌아왔을 때, 한 여성이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며 허둥지둥 뛰어왔다. 결국 다시 마을로 되돌아갔지만 찾지 못했고, 모두가 지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누군가 남편에게 “혹시 버스 안에 있을지 모르니 전화해 보라”라고 하자, 그녀 자리 근처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모두가 박수로 환호했다. 바로 앞에서도 전화를 걸었다는데, 그땐 왜 소리가 안 들렸을까. 여행 중 마주치는 작은 소동이 오히려 모두의 얼굴을 풀어주는 법이다.
점심은 에페소 근처의 한인 식당이다. 여행 중 처음 만나는 한식이라 반가웠다. 아까 소동을 일으킨 여성이 미안한 마음에 맥주를 돌리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제육볶음에 김치찌개, 비빔밥까지 든든하게 먹고 오랜만에 독일산 믹스 커피로 마무리했다. 쉬린제에서 한 잔 했던 튀르키예 커피의 여운 덕분인지, 익숙한 맛이 오히려 더 반가웠다.
에페소 유적지는 식당에서 멀지 않았다. ‘이스탄불에 하기아 소피아가 있다면 아나톨리아에는 에페소가 있다’는 말처럼, 고대의 시간과 기독교 역사가 깊게 스며 있는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반원형 극장이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았다. 사도 바울이 아르테미스 신상 판매를 막았다가 군중 앞에 끌려왔다던 바로 그 장소일 것이다. 이어 들른 체험 박물관은 무료인데, 일부 가이드가 유료인 것처럼 속여 옵션 투어로 판매한다는 말에 씁쓸함이 남았다. 여행은 결국 ‘제값 내고 가는 법’이라는 나의 지론이 떠올랐다.
가이드는 유적지로 이동하는 길에 돌길 바닥의 발자국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발자국보다 발이 큰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는, 일종의 유흥가 표식이었다고 한다. 나도 찾아보고 싶었으나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셀수스 도서관은 앞면의 웅장한 구조만 남아 있었지만, 과거 1만 2천 권을 보관한 고대 3대 도서관이었다고 한다. 근처 공중 화장실은 배수 시설까지 갖춘 정교한 구조였으나, 지나치게 좁은 간격 탓에 프라이버시는 의미 없던 시절임을 실감하게 했다.
에페소를 뒤로하고 다시 세 시간을 달려 마니사에 도착했다. 호텔 앞 대형 쇼핑몰에서 잠시 기념품을 사고 돌아오니 하루가 훌쩍 저물어 있었다. 이동이 많았던 날이지만, 사람들의 표정과 고대 도시의 숨결이 묘하게 하루를 가득 채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