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로 떠난 일주일 10

에필로그 — 길 위에서 남은 것들

by 백승인

여행을 떠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목적지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그 사이사이에 흩어져 살아 움직임을 채우는 작은 순간들이다. 이번 튀르키예 여행 또한 그랬다. 첫날 이스탄불 하기아 소피아에서 느낀 묵직한 공기,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며 바라본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 에페소의 폐허에서 느낀 고대인의 숨결, 카파도키아의 벌판, 파묵칼레의 새하얀 물결, 돌마바흐체 궁전과 톱하네 궁전의 화려함까지 거대한 장면들이 이어졌지만, 돌아와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의외로 작고 사소한 기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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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카라행 고속열차에서 간식과 땅콩을 나눠 먹던 어린아이와 젊은 엄마, 쉬린제 마을에서 모래 위 주전자를 돌려 커피를 끓이며 눈웃음을 지어 보이던 여인의 손끝, 잃어버린 휴대전화를 되찾은 이에게 모두 한마음이 되어 안도의 박수를 치던 순간, 안탈리아 호텔에서 접시를 떨어뜨리고 “너, 괜찮아?”라고 또박또박 우리말로 묻던 젊은 직원의 목소리. 부르사에서는 초등학생이 건넨 “곤니찌와”에 이어 “안녕하세요”라는 따스함이 따라왔다. 멀리 떨어진 땅에서도 사람 사이의 온기는 늘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처음엔 오래전 책에서 읽었던 역사적 장소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 자체만으로 벅찼다. 톱카프 궁전의 성물 앞에서,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인물들의 흔적이 유리장 너머에 있었고, 그 시간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유물 앞에서 ‘현재의 나’는 그저 작은 여행자일 뿐이었다. 예레바탄 사라이의 어둑한 물빛 아래 서 있을 때는 오래전에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술과 아름다움이 지하 깊은 곳에서 묵묵히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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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누군가의 살아 있었던 현실이고, 누군가의 신념과 탐욕, 사랑과 죽음이 겹겹이 남아 있는 자리라는 사실이 더 크게 와닿았다. 매일 아침 버스에 오르며 서로 안부를 건네던 일행의 표정, 낯선 땅에서 한식 한 상을 마주했을 때 밀려오던 묘한 따뜻함, 그리고 히에라폴리스 고대 극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아빠의 노래. 고대의 석벽 사이로 울려 퍼진 ‘오 솔레 미오’는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한 순간이 얼마나 오래 기억 속에 머무는지 일깨워 주었다. 여행은 결국 함께한 사람들, 그리고 스쳐 지나간 인연들이 완성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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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결국, 떠나기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사람과 풍경을 우리 삶 속으로 데려오는 과정이다. 돌아와 일상의 자리로 복귀하고 나니, 이번 여행에서 배운 것은 장소보다 ‘사람’에 가까웠다. 같은 버스를 타고 다녔지만 서로의 이야기를 잘 몰랐던 사람들, 우연히 같은 경치를 바라보며 웃고 감탄을 나눴던 순간들, 그리고 알고 보니 한 다리 건너 연결되어 있던 인연까지. 그 모든 것은 여행 중에는 스쳐 지나가는 장면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 다른 색으로 마음속에 남았다.


길 위에서 나는 내가 자세히 ‘본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는 사람인지도 깨달았다. 가이드의 말만 믿고 니케아 공의회의 장소라고 사진을 찍었듯, 종종 그 순간이 주는 분위기에 더 기대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여행의 일부였다. 여행은 정답을 찾는 일이 아니었다. 맞고 틀림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내가 무엇을 느꼈는가로 의미가 완성되는 과정이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조금 더 유연하게 다듬어 가는 과정이 아닐까 하고.
언젠가 다시 이 길을 걷는다면, 그때의 나는 또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행을 함께한 사람과 나눈 조용한 대화들, 문득 마주친 시선, 피곤한 하루 끝에 함께한 식사와 웃음들이 떠오른다. 여행의 본질은 결국 ‘풍경’이 아니라 ‘관계’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짐을 풀고 일상의 루틴으로 돌아오는 일은 언제나 어색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익숙한 것들이 더 따뜻하게 느껴지고, 평범한 하루의 무심한 순간들마저도 감사하게 느껴졌다. 좋은 여행이란 결국, 새로운 것을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이스탄불의 바람은 잠시 스쳐 갔지만, 그 바람이 가져다준 깨달음은 오래 머물 것이다.


며칠간의 긴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금, 여행은 끝났지만 여행에서 얻은 감각들은 여전히 나를 움직이고 있다. 바람 소리, 낯선 도시의 색, 사람들의 표정, 우연한 인연들… 그 모든 조각이 어느새 일상의 한 부분처럼 자리를 잡았다. 여행은 결국, 언제나 ‘다음’을 꿈꾸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 꿈을 품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다시 펄떡이는 생동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