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나만의 속도로 걸었다.
2020년 1월 이름조차 낯선 ‘코로나’가 우리 주위에 퍼져 가기 시작했다. 설 연휴 첫날, 명절 휴일임에도 비상근무 명령이 내려지고 긴급 부서장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실엔 가벼운 긴장감이 감돌았고, 부단체장은 참석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번 위기가 얼마나 오래갈 것 같습니까?”
나는 한 달 이내에 수습될 것이라 답했다. 오래전 정부의 ‘사스’ 극복 사례를 떠올려 낙관 섞인 예상을 했다. 하지만 부단체장의 전망은 비관적이었고, 결과적으로 내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코로나는 전 세계를 집어삼켰고, 세상은 팬데믹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는 분석이 쏟아졌다. 비대면이 새로운 일상이 된 시대, 나는 매일 아침 8시 화상회의로 하루를 시작했다. 확진자 동선 파악과 뒤따르는 방역 대책이 전방위로 확대되고 언제 끝날 줄 모른 채 이어졌다.
어느새 주말에 쉰다는 게 사치가 됐다. 누군가는 주식 계좌를 들여다보며 새로운 기회를 이야기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보고서와 화상 화면 속 글자에 파묻혀 있었다. 직원들은 나를 ‘코로나 국장’이라 불렀다.
그해 6월 30일, 나는 34년간 몸담았던 직장을 나왔다. 다음 날 아침, 알람을 맞추지 않았다. 해가 중천에 걸릴 때까지 늦잠을 잤고,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여유를 만끽했다. 이후 6개월 동안 미뤄두었던 취미를 하나씩 꺼내 놓는,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보냈다.
퇴직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드론을 날리고, 프로에게 당구를 배웠다. 도서관에 종일 있기도 하고, 어반 스케치를 수강했다. 제주 한달살이를 비롯해 이곳저곳을 여행했고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땄다. 골프 교습을 받고, 한식과 양식 조리과정도 수강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라는 우스갯소리를 실감했다.
퇴직 전, 나는 '제2의 인생'을 위해 단순하지만 명확한 준비를 마쳤다. 빚을 갚고, 고정 수입을 만들고, 아들을 독립시키는 일이었다. 공제회 적립금으로 주택 대출금을 갚았고, 넉넉지는 않아도 평생 받을 수 있는 연금이 있었기에 경제적 불안은 크지 않았다. 아들은 안정적인 직장을 얻고 결혼해 독립했다.
일부 동료들이 다시 생업 전선에 뛰어들 때도 나는 수입이 줄면 줄어든 대로 살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주식시장이 폭락 후 다시 활기를 띠는 동안에도 나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주식은 여전히 내 삶의 바깥에 있었다.
그렇게 만날 일이 없을 것 같던 주식이 나를 다시 찾아온 건 그해 연말이었다. 선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연락해 왔다. 종목 선정부터 매매 시점까지 완벽한 방법을 찾은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증권사를 찾는 대신 인터넷을 이용해 새로운 주식 계좌를 만들었다. 노트북으로 마주한 HTS 창은 낯설었던 예전과 달리 생소하면서도 오래전 길이 엇갈렸던 연인을 다시 만난 듯 반갑고 친근했다. 신분증과 도장을 들고 눈치를 보며 증권사를 찾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
2021년 1월, 새해 벽두부터 나는 노트북을 펼치고 선배의 지시에 따라 기계적으로 매매를 했다. 업종이나 재무 상태 등 아무것도 모른 채 매수 버튼을 누르는 행위를 투자라고 할 순 없겠지만 마음이 편했다. 혹시나 일이 잘못되어 전액 손실을 보더라도 괜찮을 정도의 금액으로 투자금액 상한을 정했다. ‘초심자의 행운’이었을까, 첫 주에 60만 원을 벌었다.
곧 부자가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진 나는 그 돈으로 27인치 모니터를 포함해 컴퓨터를 샀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여건이 좋아지면 모니터를 두 대 설치해야 할까 하는 어쭙잖은 생각도 했다. 기대가 무너지고 현실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다음 주에 곧바로 60만 원 가까이 손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후 지루한 공방이 이어졌다. 결국 그 컴퓨터는 주식으로 번 전리품이 아니라 요즘 말로 하면 ‘내돈내산’인 셈이다.
나는 퇴직 후 아내의 적극적인 격려에 힘입어,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공동 사무실을 내기로 했었다. 주식을 하면서 틈틈이 부동산 중개소를 통해 적합한 사무실 공간을 찾아다녔다. 그 시간을 제외하면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거의 매일 모니터 앞에 앉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얼마나 미련한 짓이었는지. 언제든 주식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부지런히 발품을 판 덕분에 2월 중순, 원하는 공간을 구했고, 마침내 3월 초에 사무실 문을 열었다. 나는 선배에게 주식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미안함보다는 홀가분함이 컸다. 그렇게 나는 다시 주식에서 물러났다. 세상은 달아오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여전히 나만의 속도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