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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 진료 의자에 앉으면

by 백승인

내가 가장 공손한 자세를 갖추는 장소는 교회나 성당 또는 사찰이 아니다. 바로 치과 진료 의자 위다.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르고 지정해 주는 진료 의자에 앉는 순간, 나도 모르게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두 발을 가지런히 놓았다. 치과에 갔다가 문득 그런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피식 웃음이 났다. 생각해 보니, 이번에만 그런 것이 아니고 늘 그랬다. 친구들과 이야기해 보니 진료 의자에 앉을 때 신발을 벗었다는 사람도 있고, 그 자리에 앉았을 때 지나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 적 있었다는 사람도 있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나의 태도 역시 언제나 자연스럽게 차분해졌다.

내가 다니는 치과는 30대 중반이었을 때부터 30년 넘게 가는 곳이다. 그동안 이사를 세 번이나 했지만 치아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늘 그곳으로 갔다. 아들이 중학교 다닐 때 교정 치료를 받았고, 손주는 입 안에 상처가 생겨 찾아갔으니, 우리 가족 3대가 다니는 치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치과 원장은 꽃미남 청년이었는데 이제 60대가 되었다. 원장이 진료하는 동안에는 계속 그곳으로 다닐 생각이다.


그렇지만 가장 가고 싶지 않은 곳 중 하나가 치과다. 정기적인 스케일링 치료를 받기 위해 1년에 한 번 방문하는 것 외에는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다. 그런데 얼마 전, 위쪽 앞니 잇몸에 좁쌀만 한 혹이 생겼다. 통증도 없고 불편하지도 않아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저절로 사라지는 듯싶더니 며칠 뒤 다른 자리에 다시 혹이 생겼다. 아내에게 보여주었더니 당장 치과에 가라고 성화였다. 내가 미적거리자 아내가 앞장서며 나를 데리고 갔다.

진료 의자에 앉아 혹이 생긴 잇몸을 보여주자, 원장은 간호사에게 엑스레이를 찍도록 지시했다. 사진을 판독한 그는 잇몸에 염증이 생겼으며, 이 뿌리 두 개를 잘라내는 수술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어렵지 않은 수술이라며 안심시키려 했지만, 나는 예전에 사랑니를 뽑을 때의 고생이 떠올라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수술 후 거울에 비친 잇몸을 보여 주는데, 마치 동굴 입구처럼 휑하게 뚫린 것처럼 보였다. 괜찮을까 싶었지만, 다행히 마취 덕분에 통증은 없었다. 커다란 거즈를 입 안에 넣고 몇 시간 동안 그대로 있어야 했다.

그 후로 매주 한 번씩 경과를 확인하러 내원했고, 한 달 뒤에 엑스레이로 확인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다시 치과를 찾았다. 이번에도 잇몸을 절개하거나 치료를 하는 게 아니라 엑스레이로 확인하는 것뿐인데도, 진료 의자에 앉자마자 나의 자세는 어느 때보다도 겸손하고 다소곳했다.

세상 무서울 것 없다는 듯 오만방자한 사람 누구라도 치과 진료 의자에 한 번 앉혀 보라. 그곳에서는 모두 얌전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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