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비슷한 시기에 퇴직한 동료 세 명과 함께 작은 사무실을 마련했다. 차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고, 서로의 가족 이야기를 했다. 가끔은 부부동반 여행도 했다. 우리는 일상을 공유하는 동료이자 친구였다. 각자의 책상과 컴퓨터, 그리고 사무실 한쪽을 차지한 당구대까지. 가끔은 진지하게 각자의 일을 하다가도, 시간이 나면 당구 한 게임으로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사무실을 마련할 때 우리는 최소한 10년은 함께하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에게 예상하지 못한 변화를 가져왔다. 한 동료는 어머니 병간호로 자리를 비운 지 벌써 5개월이 넘었다. 또 다른 동료는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어야겠다고 했다. 남은 한 사람도 올해부터 시간제 일자리를 구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결국 사무실을 운영한 지 4년 만에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정리는 당구대를 처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한때 사무실의 절반을 차지하며 우리의 쉼터였던 그것이 사라지자 공간이 텅 빈 듯했다. 이어서 복사기, 회의용 탁자와 의자들도 중고로 내놓았다. 개인 물품들도 하나둘씩 정리되면서 사무실은 점점 휑한 모습이 되어갔다. 이 공간을 정리하는 일이 마치 오랜 친구와 헤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개인 물품을 챙기며 컴퓨터를 집으로 가져온 날, 내 방 책상 위에 있던 책꽂이를 치운 뒤 그 자리에 모니터를 올려놓았다. 전원을 연결하니,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아내와 나란히 앉아 라디오에서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제 나는 정말 퇴직했다. 평생 몸담았던 직장을 떠난 지 4년이 흘렀지만, 사실 그동안은 퇴직했다는 걸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동료들과 함께했던 사무실이 나에게 또 하나의 일터였고, 익숙했던 일상의 연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단순하지만 명확한 진리를 다시금 되새긴다. 우리의 사무실도, 우리가 함께한 시간도 끝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끝이 아닐 수도 있다. 새로운 길을 모색할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함께했던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나눈 시간과 추억들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겠지만,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다시 당구 한 게임하자며 연락을 주고받는 날이 있을 거라 믿는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길을 함께 걸어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아쉬움도 있지만, 머나먼 길을 돌고 돌아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느껴지는 평온한 시간이었다. 그때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브런치스토리 작가에 선정되었다는 메일이었다. 금요일에 신청서를 쓰고, 월요일 오후 급하게 수정했던 터라 주말쯤에나 결과를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빨리 하루 만에 반가운 소식이 찾아왔다.
나는 평소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퇴직 전에 작성했던 버킷리스트에는 ‘부부 문집 발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틈틈이 써놓은 글이 제법 있었지만, 아직은 누군가에게 보여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글 쓰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내는 문집을 내는 것에 완강히 반대했다. 그렇게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글들이었다. 사무실을 정리하기로 하면서, 나는 그동안 써놓았던 글을 다듬고 새로 썼다.
지난해 연말, 친한 선배 한 사람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일화에 나의 경험을 더한 짧은 글을 써, 올 초에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반응이 예상보다 좋았다. 용기가 생겨 다른 글 두 편을 더 올렸더니, 그걸 본 선배 한 사람이 계속 글을 써보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퇴직 후 성장하고 도전하는 모습을 기록해 보겠다며, 무모하게도 브런치스토리 작가 신청을 하게 된 것이었다. 젊은 사람들도 서너 번씩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다섯 번 정도는 도전해 볼 생각이었다.
사무실이 없어지는 대신, 나는 브런치스토리 작가라는 이름을 얻었다.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내 앞에는 새로운 시간이 펼쳐지려 하고 있다. 동료와 함께 한 물리적 공간은 사라졌지만, 글을 쓸 상상적 공간은 오히려 더 넓어졌다. 이제는 나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차례다.
나는 '퇴직'을 이야기하는 현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