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의 진정한 은인

by 백승인

장하준 교수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라고 한다. 인터넷 혁명의 경제적, 사회적 영향은 최소한 지금까지는 세탁기를 비롯한 가전제품만큼 크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 농림부에서 근무했던 루비노라는 사람이 1906년 논문에서 '식기 세척기를 발명하는 사람이야말로 인류의 진정한 은인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고 저자는 소개한다. 책을 읽을 당시엔 과장된 표현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말이 아주 실감 나게 다가온다. 우리 집에 식기 세척기를 들인 후 일어난 변화 덕분이다.


아내가 미니멀리즘을 좋아하는 탓에, 우리 집 거실은 단정하고 간결하다. 벽걸이 TV와 4인용 소파, 그리고 탁자 하나가 전부다. TV 아래에 흔히 있는 거실장도 없고, 장식품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주방도 깔끔하다. 눈에 보이는 건 정수기와 식기 건조기, 주방세제뿐이다. 그 외에는 물 컵과 커피 잔이 올려 있는 작은 선반이 모서리 가까운 한쪽 벽면에 달려 있는 것이 전부다. 아내는 ‘덜어내기’에 능한 사람이다. 어떤 물건이든 집에 들이기 전엔 꼭 필요성과 기능성을 따져본다. 그래서 무언가를 새로 들이는 일에는 자연히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아내가 식기 세척기를 들이기로 한 건, 말 그대로 큰 결단이었다.

사실 아들이 꽤 오래전부터 식기 세척기의 장점을 이야기해 왔다. “엄마, 이거 진짜 좋아요. 설거지할 일이 확 줄어요. 엄마도 꼭 써보세요.” 아들은 진심으로 권했지만, 아내는 늘 웃으며 넘겼다. “두 식구 밥해 먹는데 그 정도야 내가 하면 되지.” 평생 손수 설거지를 한 아내에게 식기 세척기는 그다지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특히 기계로 닦으면 얼마나 깨끗할지 의심이 앞섰고, 직접 자기 손으로 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과 5분 거리에 살고 있는 아들이 금년 2월부터 휴직하고 육아를 담당하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아내가 손주를 자주 보고 싶은 마음에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우리 집에 와서 쉬다 가게 데려오라고 아들에게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손주가 평일 오후 4시경 와서, 간식과 저녁을 먹고 놀다가 6시 30분쯤 돌아간다.

처음에는 아들이 손주의 밥과 간식을 모두 준비해 왔지만, 그와 별개로 아내가 따로 음식을 준비했다. 이제는 아들이 반찬거리나 고기 등을 사 오기도 하지만, 아내는 아이가 먹을 식재료를 그날그날 사다가 조리한다. 오후 2시부터 반찬을 만들고, 국을 끓이고, 밥을 짓는다. 나도 식탁에서 과일을 썬다. 칼질 소리, 조리도구 부딪히는 소리, 냄비나 프라이팬이 내는 소리가 주방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합주곡처럼 잘 어울린다. 집 안은 어느새 설레는 명절 전날처럼 바쁘고 정겨운 분위기로 가득하다.


물론 손주가 다녀간 뒤에 따라오는 건 어김없는 설거지다. 아이가 먹은 작은 접시들부터 반찬 그릇, 국그릇, 과일 담은 그릇, 냄비, 프라이팬까지 종류도 많고 양도 적지 않다. 평소 두 사람이 사용하는 식기 양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아내는 원래 음식을 보기 좋고 정갈하게 담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그릇 수가 자연스레 많아진다. 결국 저녁 시간이면 주방 싱크대 앞에 서서 한참 설거지를 해야 했다.

아내가 어느 날 말했다. “식기 세척기, 한번 들여볼까?” 늘 ‘내 손으로 해야 깨끗하다’ 던 사람이 기계를 받아들이다니. 물론, 아들의 권유가 밑바탕에 있었을 테지만 결정적인 건 몸이 느낀 피로였을 것이다. 주방 구조를 살펴보고 크기와 성능, 가격을 비교해 가며 아들과 신중하게 의논한 끝에 적당한 제품을 하나 골랐다. 식기 세척기가 설치된 날, 사용법 영상을 몇 개 찾아보더니 곧 능숙하게 기계를 작동했다.


그날 저녁부터 아내의 반응이 달라졌다. “이게 이렇게 편한 거였어?” “진작 아들 말 들을 걸.”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네.” 아내는 매일 저녁 설거지 대신 차 한 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게 됐다. 처음엔 조심스럽던 칭찬이 며칠 지나지 않아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건 진짜 삶의 질이 달라지는 물건이야.” “아들 말 들어 나쁜 거 하나도 없네.”

그 이후로 식기 세척기 전도사가 되었다. 친구들과 통화할 때면 “진짜 식기 세척기 안 쓰는 사람은 손해 보는 거야.” “설거지 별거 아니라고? 나도 그랬지. 근데 이건 차원이 달라.” 그렇게 말하면서 아직 사용하지 않는 친구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난다. 한때는 “그깟 설거지쯤이야”라고 하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생각해 보면, 삶의 변화는 거창하게 오는 것이 아니다. 식기 세척기처럼 실질적인 도구 하나가 일상의 무게를 나눌 수 있다. 그 변화는 단지 번거로움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가족 간의 시간과 여유를 만들어주었다. 아내는 더 이상 주방 일에 지치지 않고, 손주와의 시간을 여유롭게 즐긴다. 나 역시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놓이고, 덩달아 일상이 풍요로워졌음을 느낀다. 루비노의 말처럼 식기 세척기를 발명한 사람은 '인류의 진정한 은인'이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우리 집의 진정한 은인'인 것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