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본 공은 없다지만

by 백승인

맞벌이하는 아들 부부를 돕는 한편, 사랑스러운 손주를 자주 보고 싶은 마음에 아내와 나는 매일 오후 어린이집으로 향한다. 하원 시간에 맞춰 초인종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조그마한 얼굴 전체로 웃음을 머금은 손주가 두 팔을 벌리고 다가온다. 아이는 “하~지!”라고 부르며 내 품으로 안긴다. 교사에게 인사하듯 나와 아내를 가리키며 “하~지”, “아~니”라고 소개할 때마다 웃음이 절로 난다.

아들이 복직하고 우리 부부가 처음으로 손주를 데리러 간 날, 어린이집 교사는 우리에게 “이제 아이가 제법 잘 걸으니 너무 안아주려 하지 말고 스스로 걸을 수 있도록 해 주세요”라고 당부했다. ‘알겠습니다.’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막상 문이 열리고 손주가 두 팔을 벌려 오면 나도 모르게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 만다.

어느 날, 어린이집을 나온 뒤 근처 놀이터로 향했다. 손주가 품에서 몸을 뒤틀며 내려달라는 몸짓을 하기에 바닥에 살며시 내려놓았는데, 땅을 밟자마자 마치 달리기를 하듯 앞으로 뛰어가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다리가 들리고 얼굴이 바닥에 닿는 순간, 울음이 터졌다. 놀라서 얼른 안아 들고 살펴보니 입술이 살짝 부르텄을 뿐 다행히 피가 나거나 이를 다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부주의했구나’ 하는 생각에 자책감이 밀려왔다.

그 순간, 동영상을 찍고 있던 아내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걱정과 원망이 섞인 눈빛이었다. 나는 억울했다. 내려놓자마자 그렇게 빨리 뛸 줄은 몰랐으니까. 크게 다치지 않은 게 그저 고맙고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며칠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아내가 아이의 얼굴과 손을 씻기려고 세면대 수전 레버를 온수 쪽으로 돌려놓고 물을 미리 틀어두었는데, 내가 아이를 안고 다가가는 순간, 아이가 손을 뻗어 뜨거운 물에 닿자 깜짝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화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아내의 눈빛은 곧바로 내게 향했다. “조심 좀 하지”라는 말이 들리지 않아도 느껴졌다.

그때 나는 속으로 ‘추운 날도 아닌데 왜 이렇게 뜨거운 물을 미리 틀어놨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사람이라, 불만이 표정에 고스란히 묻어났을 것이다. 아이는 금세 울음을 멈췄지만, 우리 부부 사이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아이를 함께 돌보는 일은 ‘사랑의 협업’이면서도 동시에 ‘책임의 분담’이라는 걸 그때 새삼 느꼈다.

가을 햇살이 따가운 어느 날, 아이는 초겨울에나 입을 법한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아내가 정성껏 준비한 저녁을 손주에게 먹이는데, 평소와 달리 밥을 잘 먹지 않았다.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목 언저리엔 붉은 반점이 보였다. 아이는 손을 스웨터 안으로 넣어 어깨를 긁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스웨터를 벗기니 어깨뿐 아니라 몸 여러 곳에 붉은 반점이 퍼져 있었다.

아내는 서둘러 아이의 땀을 닦고 욕조에 미지근한 물을 받아 물놀이를 시켰다. 아이는 금세 웃음을 되찾았고, 반점도 조금씩 옅어졌다. 저녁 무렵 퇴근한 아들이 손주를 데리러 왔을 때, 우리는 괜히 변명하듯 말했다.
“오늘은 뭘 잘못 먹은 건 아닌데… ”
아들은 웃으며 “며칠 전에도 그런 적 있었어요. 괜찮아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순간의 방심이 아이에게 상처로 이어질 수도 있고, 잘해주려던 일이 오히려 문제로 번지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애 본 공은 없다.”

그 말속에는 ‘아무리 수고해도 돌보는 이의 노고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쓸쓸한 진실이 숨어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돌보는 일은 힘들다. 실수는 곧바로 책임으로 돌아오고, 칭찬보다는 걱정이 먼저 돌아온다. 그래도 손주가 내 품에 안겨 “하~지” 하며 웃을 때면, 그 모든 피로가 한순간에 녹아내린다.


손주는 아직 말보다 표정이 더 많은 나이다. 울고, 웃고, 삐치고, 다시 웃는다. 그 모든 변화를 바라보는 일은 기적처럼 아름답다. 어린이집 현관문이 열리고 손주가 두 팔을 벌리며 다가오는 순간, 나는 또다시 아이를 안아 올린다. 교사의 당부도, 나의 다짐도 그 순간에는 모두 사라진다.
애 본 공은 없다지만, 애 보는 기쁨만큼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