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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지적 작가 시점 Apr 11. 2022

(여친소? 여파소!) 내 여경 파트너를 소개합니다.

슬기로운 형사생활(2001.)

2001년 어느 날, 한 남성이 한 여성의 멱살 붙잡고 조사계(지금의 경제팀) 사무실로 씩씩 거리며 들어왔다.

그녀가 들어오는 순간, - 피해자가 워낙 씩씩거리며 들어오기도 했지만 -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를 포함한 우리 30여 명의 수사관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쳐다봤을 정도로 그녀는 뛰어난 미모의 여성이었다.

당시에는 칸막이도 없는 넓은 공간에 30여 명의 수사관이 모여 같이 조사를 했다.


빼어난 외모의 이면에는 젊은 남자들에게 결혼하자고 접근해서는 돈을 사기 친, 속칭 혼인빙자 사기  동종 수법 전과가 여러 건 있는 사기범이었다.


나 보다 7살 연상이신 파트너 조원 여경 홍 경사님이 담당으로서 조사를 시작했다.

너무나도 냉정하게... 덤덤하게... 조사를 했다.


이리 앉으세요. / 성함은요? / 어떻게 같이 오시게 된 거죠? / 그동안 어디에 계셨던 거죠? / 혼인할 의사는 있었던 거예요?  / 피해액은 어디에 쓰신 거죠? 등등 일사천리로 조사를 진행했다.


내 바로 옆 자리에서 조사를 하고 있는 지라, 질문 내용과 답변들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동안 주거 불특정에 도주까지... 동종 전과도 있어서 구속 영장 신청을 검토해 볼 만한 상황.


이러한 점을 파악하기 위해 홍 경사님이 거주지가 어디예요라고 묻자 고시원에 거주한다고 하자, 바로 옆에서 대질 조사를 하고 있던 피해자가 "다 거짓말이에요, 제가 그 고시원에 몇 번 가봤는데 없었어요!!" 한다.


이 말을 들은 그녀는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오열하듯 말했다.


"아니, 같은 사건으로 한 번 빵 갔다 온 X이 또 사기를 쳤겠어요? 흑흑. 이 사람이 자꾸 찾아와서 독촉하고 그러니까 무서워서 같은 고시원에 다른 호실로 옮긴 것뿐이라구요. 흑흑"


그리고는 전에 있던 호실은 000호인데 XXX호로 옮겼고, 전화번호는 02-XXXX-XXXX이고요... 등등 너무나 실감 나게 항변을 한다.

홍 경사님은 그런 그녀의 오열에 아무런 동요도 없이 차분하게 조사를 마치고는... 구속영장을 신청해야겠다고 구두로 건의를 한다.


나는 아까 조사받을 당시의 안타까운 오열과 몇백만 원 상당의 피해액, (피의자 진술에 따르면 그럴싸한... 결국은 내가 속았지만) 일정한 주거 등등... 불구속을 참작할 만한 사유를 거론하며 일단 불구속하고, 나중에 사전 구속영장을 신청하든지 재판에서 실형을 받게 하든 지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했다.

(양심 고백하자면... 당시 나는 수사 경험도 부족하고, 젊었던지라... 피의자의 외모와 오열, 눈물도 그 판단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리라...)

사전 구속영장 : 불구속 상태에서 보강수사 등을 통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판사의 구속 전 심문을 통해 구속 여부를 결정하는 절차, 이에 반해 사후 구속영장은 체포 후 석방하지 않고 유치장에 입감한 상태에서 구속영장을 신청한다.


홍 경사님은 피해자가 직접 잡아서(?) 오기도 했고, 남성들을 상대로 결혼하자고 속여서 돈을 사기 치고, 양가 부모 인사도 다 드리고, 웨딩촬영도 하고, 심지어 결혼식 날짜까지 잡아놓았다가 당일 날 나타나지 않아서 피해 남성과 가족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힌 전과도 있는데, 그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구속영장을 신청하는 게 맞겠다고 한다.


피의자는 나이트클럽 등지에서 남자를 만나 결혼하자고 속여 결혼자금 명목으로 돈이나 신용카드를 달라고 하여 소비하였고,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동거를 하며 웨딩촬영을 하고, 심지어 결혼식 날짜까지 잡아놓고 당일 날 도망하여 결혼식을 망치기도 했었다.
 
이 사건 피해자는 2,000만 원 상당 피해를 당해 고소를 해서 피의자가 구속되었으나, 울면서 사정을 하여 고소를 취소해 주었다. 그 후 동일한 피해를 또 당하여 나이트클럽을 수소문 끝에 피의자를 발견하고 경찰서로 데리고 온 것이었다.


동종 전과가 있다고 해도, 이미 처벌을 받은 사안이고, 얼마나 억울했으면 절규하듯이 " 번 구속된 사람이..." 도 아닌 "... 한 번 빵 갔다 온 X이..."라는 은어까지 써가면서 그럴까 싶었다.

피해자가 직접 데려온 부분도 영 석연치 않았다.


홍 경사님과 의견 대립이 지속되었다. 영장을 쳐야 한다, 칠 필요가 없다... 도망갈 여지가 다분하다... 고시원도 일정한 주거지다 등등...

결국 1차 결재권자인 내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피의자를 일단 그냥 귀가시켜야 하는 홍 경사님은 내내 마음이 불편했을 거다.

피의자는 체포된 것이 아니어서 석방 절차를 거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조사 끝났으니 귀가하세요라고 설명하는 식으로 보냈다. 구속영장을 신청하려 했으면, 그 당시 긴급체포를 했어야 했다.


피의자가 귀가한 다음 날... 피의자가 거주한다는 고시원에 연락을 했다.


아뿔싸, 모두 허위다!!


전화번호는 S카드사 전화번호였고,(하도 신용카드 대금 독촉을 많이 받아서 인가 그 전화번호를 암기하고 있다가 불러준 것이었다.) 고시원에 문의하니 이미 월세가 밀려서 나갔다는 거다. 휴대폰도 없고, 주민등록도 말소되었고, 일정한 거주지도 없고, 다시 소재 불명이 된 것이다!


그날부터 우리 홍 경사님은 며칠 동안 거의 매일 피해자와  어머니의 항의 전화를 다 감내해야 했다. "어떻게 되고 있어요?", "소재는 파악된 거예요?", "무슨 일처리를 그렇게 해요?" 등등...

특히 피해자 어머니는 "홍 경사는 그 X을 왜 도망치게 놔뒀어요? 당신도 사기꾼 X이랑 똑같은 X이야!" 등등 온갖 욕설을 다 들어야 했다.


피해액을 떠나서 금쪽같은 아들인데, 결혼한다고 사기당하고, 시어머니 될 뻔한 입장에서도 당했다고 생각하니 분이 나고 화도 많이 나셨을 거다.


결국 피의자의 소재를 확인하지 못한 채 불구속 상태로 검찰에 송치하였고, 검찰에서는 피의자의 소재불명을 이유로 구속영장 수배를 했었다.

당시는 형사사법포털(kics)이 검찰과 연동되어 있지 않아 처분 결과를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이후 그녀에 대한 사건이 더 이상 접수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결국 체포되어 구속되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내 경찰 인생에 있어 중대한 교훈을 준 사건이 되었는데, 그 후에는 수사 대상자의 외모나 특히 여성의 눈물에 절대 흔들리지 않고 사건 자체로만 판단을 하게 되었다.

실제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일 수도 있으나, 감정에 호소하기 위한 쇼 같은 눈물도 있었다.
20년 전인 2002년 3월 조사계 근무 당시 홍 경사님과 사무실에서.


죄송합니다. 홍 경사님, 아니 이제는 홍 경위님... 예전에도 사과를 드린 적이 있었던 듯 하지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정중하게 사과를 드립니다. 그때 정말 죄송했습니다. 제 판단이 틀렸었습니다.


조만간 한번 찾아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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