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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지적 작가 시점 Apr 07. 2022

혹시 당근? 당신을 절도 혐의로 체포합니다.

2008년 여름, 개인 블로그에 고가의 모피코트를 판다는 글이 다수 게시되었다. 

몇몇 모피코트는 이미 팔렸다고 되어 있었고, 그 외 다른 물건들도 판다는 글이 있었다.


그 중 작년 겨울 매장에서 도난당한 698만 원 상당의 모피코트가 있다는 신고를 받고, 입건 전 조사(내사)에 착수하였다.


피해자가 적시한 모피코트의 일련번호가 일치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물건들도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이 대부분이라 모두 장물로 강력히 의심이 되었다.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를 통해 물건들을 압수하고 사를 진행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 임의 수사가 원칙이기도 하고, 모피코드 한 벌만큼은 장물이 확실한 지라 물건을 사는 것처럼 위장하여 수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중고거래를 여러 번 해본 경험이 있는 내가 직접 거래를 시도했다.(나는 지금도 당근러다.)


에게 선물로 줄 것이라면서 모피코트를 사고 싶다고 문자를 보내자, 그녀 성실하게 답장을 줬고, 나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정품 맞죠, 네고 좀 가능할까요 등의 질문을 계속하면서 거래를 시도했다.

과천역 쪽으로 와주는 조건으로 약간의 네고를 받기로 거래가 성사되었고, 저녁에 직거래하기로 약속을 정했다. 약속 시간 20분 전에 미리 도착해서 그녀의 도주를 대비하여 주변에 형사 2명을 배치한 것은 물론이다.


약속시간이 되자 그녀 모피코트를 종이 가방에 담아가지고 나왔다.

그녀는 한 번도 안 입었던 이라면서 나를 안심시켰고, 나는 모피코트의 일련번호를 확인하고 장물임을 확신하고는 신분증을 보여 주었다.


장물로 의심되어서 수사 중이라며 어디서 난 것이냐고 물으니 눈도 깜빡하지 않고 너무나도 태연하게 백화점에서 샀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럼 결제는 어떻게 했냐는 물음에 신용카드로 했다고 하여 그렇다면 신용카드 결제 내역을 확인시켜 주면 돌아가겠다면서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십여 초가 흘렀을까, 무미건조한 말투로 죄송하다면서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오히려 물었다.


경찰 앞에서도 전혀 긴장함이 없어 초범이 아니겠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제 5개월 된 어린아이가 있으니 집에는 보안을 유지해 달라는 부탁까지 하는 걸로 보아 도벽이 아닐까 의심이 되었다.

그녀는 블로그에 있던 나머지 모피도 모두 장물이니 반환하겠다며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안내를 하였다.


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녀의 빌라가 있었다.

2층 현관에서 아이를 안고 있던 남편을 뒤로하고, 그동안 훔친 모피들을 가지고 집을 나서는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다가 골목길을 빠져나와서 그녀가 건네주는 모피를 차에 싣고는 같이 사무실로 왔다.


사무실에서 조사를 하면서 내내 눈물을 흘리며 죄송하다고 했지만, 기존에 동종 전과도 여러 건이 있었고, 모피의 가격 등을 고려한다면(5차례 1,700만원 상당) 구속영장을 신청해도 될 만한 사안이라 판단이 되었다.


하지만, 순순히 장물을 반환하였고 생리 도벽이라고 이야기하고, 5개월 된 아기 등을 고려했을 때, 구속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료를 받는 것이 더 도움이라고 판단해서 치료를 반드시 받는다는 전제 하에 불구속 조치를 취했다. 

다음 날 바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서 진단서를 제출하기로 말이다.


약속대로 다음 날 그녀는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았다며 진단서를 제출하였고, 그 후 틈틈이 안부를 전해 왔다.


사건을 검찰에 송치한 다음 몇 개월 후에는 재판 결과 집행 유예를 받았다면서 아기를 안고 친정 엄마와 같이 음료수 한 박스를 사 들고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때 도와줘서 정말 고맙다고 할 때는 내 판단이 옳았구나 하는 생각과 사람 하나 살렸다는 생각에 코끝이 찡했다.

 

후에도 몇 개월에 한 번 정도 안부 문자가 오곤 해서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사건 발생 이후 1년 여가 지났을까.

보통 안부 문자만 보내오던 그녀가 전화를 걸어왔다. 무슨 일일까 싶어 휴대폰을 받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죄송하지만 지금 서울의 한 경찰서에 잡혀 가는 길인데 도와줄 수 없겠냐는 것이었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또 훔치다가 검거된 것이었다.


순간 극도의 실망감과 배신감에 할 말을 잃었다.


실형을 면하기 위해 몇 번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았다가 집행유예를 받고 나서는 병원 치료를 가지 않은 것이었다.

내가 검거한 것도 아니고 도와줄 길도 없어서... “그런 사안은 제가 도와드릴 수가 없네요”라고 힘없이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때는 실형을 받았을 것이다.


도벽은 범죄가 아니라 질병입니다. 반드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관련 기사>

https://m.news.nate.com/view/20080819n06767



@ 슬기로운 형사생활(200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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