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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지적 작가 시점 Jun 28. 2022

밥은 식판에 서류는 결재판에 아닌가요?

<라떼마리즘> 10년 아닌 4년 만에 강산이 변해버렸다.

"자기~ 이 책 하나 가져가~"


주 호치민 총영사관 경찰영사 파견 근무 4년을 마치고 돌아온 2019년 8월.

임시 보직으로 지구대장을 맡았다.

93학번인 나를 위해 감 떨어지지 말라고, 아내는 첫 출근 날 '90년생이 온다' 책을 챙겨주었다.

하지만 나는 파견 기간 동안 본 변사체가 형사 하면서 본 변사체만큼 많았을 정도로 사건사고에 치어 살았기 때문에 경찰의 감이 여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무실 직위표를 확인해 보니 음... 97년생이 막내였다.

말로만 듣던 아들 뻘이니 대학생 때 태어난 아이들이니 하는 그런 직원들이 근무를 하고 있었다.


책에서 봤듯이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라떼 이야기는 최대한 자제하고, 지켜보는 위주로 했다.

다들 열심히 했다.

절제된 친절을 바탕으로 법과 규정된 절차에 입각해서 일처리를 깔끔하게 했다.  

당당한 청년 경찰을 보는 것 같아 조직 선배로서도 뿌듯했다.


전날 처리해 준 일이 감사하다며 가져온 박카스 한 박스 조차도 김영란법에 따라 매몰차게(?) 거절하는 그들을 보면서 경찰의 미래가 밝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던 와중에 눈에 거슬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다들 결재를 하러 오는데, 서류 한 장만 덜렁 가져와서는 책상 위에 올려놓고 결재를 해 달라고 했다.

간단한 프린터 토너 교체하는 물품 청구서부터 각종 계획서, 사건 발생 보고 등 모든 서류를 그렇게 했다. 연차가 좀 된 직원들이나 팀장들은 당연히 결재판에 서류를 넣어서 가져왔다.


잘 모르는 것 같아 한 마디 해주려다가 꼰대, 갑질이 될 것 같아 꾸~욱 참았다.

포커페이스가 잘 안 되는 성격이라 결재판 없이 결재를 하러 오면 불편한 기색을 최대한 감추고는 결재를 하곤 했다.


그렇게 6개월 여가 지났고, 정기 인사로 인한 부서 이동 하루 전날.

관리반 직원을 불렀다.


- 김 반장~ 그동안 말을 안 했었는데, 혹시 후임자가 와서 전임자가 이런 사소한 것도 안 가르쳐줬냐고 할까 봐 이야기를 해줘야 할 것 같아서요.

- 서류는 보안도 지켜져야 하고, 아무리 단순한 서류 한 장이라도 결재판에 넣어서 결재받는 거예요. 그러니 내 후임자 왔을 때는 결재판에 서류를 넣어서 결재받도록 해요.

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해 주었다.

우와~ 난 참 너무 멋지지 않은가, 6개월 동안 꾸~욱 참고 있다가 떠나기 하루 전날 아름답게 조언해 주고 떠나니 말이다(?) 하는 뿌듯함은 덤이었다.


보직을 이동한 수사부서에도 상황은 똑같았다.

젊은 수사관들은 범죄경력조회 의뢰서도, 검거보고서도 서류 한두 장만 덜렁덜렁...

연차가 있는 직원들은 한 장이라도 결재판에...


팀장 회의 때 지구대에서 있었던 일을 예로 들어가며 또 이야기했다.

젊은 직원들에게 뭔가를 알려 주려 하면 꼰대나 갑질 된다고 해서 조언을 안 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결재판 같은 기본적인 건 알려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다시 한번 자뻑 × 2 했다.

'이건 직장생활에서의 기본을 전파하는 거야' 하면서 말이다.


그 며칠 후, 이 모든 것이 10년이 지나지 않아 강산이 변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나만의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대기업 임원으로 계시는 친척 형님과 저녁 식사 자리였다.


- 형님, 요즘 젊은 친구들은 간단한 결재판 쓰는 것도 모르더라고요. 고참들이 안 알려 주나 봐요.

- 응? 우리는 결재판 안 쓴 지 오래되었는데.

- 아니, 결재판을 안 쓴다고요?

- 그래, 누가 요즘 결재판 써. 심지어 보고서에 형광펜이나 밑줄도 못 긋게 해. 실질이 중요한 거지, 형식적인 것보다.


헉!

보고서 결재판에 담는 것은 기본이고, 중요 부분에 형광펜으로 밑줄도 두껍게가 아닌 아주 얇게 그어서 얼마나 예쁘게(?) 변신시켜서 보고하느냐가 보고 센스 유무의 차이였었는데...

그게 아닌 거였다.


이번엔 일반 회사에 다니는 친구에게 똑같은 걸 물어봤다.

- 응. 우리는 아예 종이가 없어. 그냥 내부망 메신저로 전송해 놓고 가서는 화면 보면서 설명해~ 한다.


아... 이거 4년이 10년처럼 흘러갔구나 싶으면서 자뻑했던 내 모습을 회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음 날.

팀장 회의를 소집했다.

제가 시대에 뒤떨어졌던 모양입니다. 결재판 이야기한 거 다 취솝니다.


앞으로는 그냥 서류만 가져오세요~


조금만 신경 안 쓰면 시대에 바로 뒤처지는 세상이 왔다.


<라떼마리즘>

형식보다 실질이 우선이다.
결재판을 집어치워라. 보고서만으로 보고하고, 보고 받아라.  
보고서에 밑줄도 긋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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