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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지적 작가 시점 Feb 16. 2023

힘든 일이 있으세요? 북극곰은 절대 생각하지 마세요!

연예인들은 왜 악플에 극단적 선택을 할까?

"형사님! 어떻게든 돈은 돌려받을 수 없는 건가요?"

"네,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그런데, 혹시 북극곰 이야기 아세요?"



2021년 여름.

싱글맘으로 딸을 하나 키우던 40대 후반의 A 씨.

주변 지인들의 소개로 인터넷 돌싱 카페에 가입을 했다.


가입한 지 며칠 후...

오프라인 모임에 호기심 반, 기대 반을 가지고 참석했다.


다른 회원에 비해 유독 귀티가 나고 재력을 자랑하던 동갑내기 B 씨가 눈에 들어왔다.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헤어졌는데, 다음 날 B 씨는 그녀를 만나러 사무실 근처까지 찾아오는 등 적극 구애를 펼쳤다.


그렇게 호감을 가지고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문 사기꾼 B 씨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수억, 수십억 상당의 잔고가 있는 폰뱅킹 화면을 보여주며 예전 증권회사에 다녔었는데, 지금은 프리랜서로 주식을 운영한다고 하면서 왜 싱글맘으로 어렵게 사느냐, 재테크해서 자산을 늘리고 노후를 준비하라는 둥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잔고를 보여주던 그 폰뱅킹 화면은 위조된 캡처 사진이었음을 알 수 없었던 그녀.

돈을 맡기면 수익률 좋은 펀드나 주식에 투자해서 돈을 불려 주겠다고 한 말에 속아 대출까지 받아 3,000만 원을 송금했는데...


뒤늦게 낌새를 눈치채고 원금이라도 돌려달라고 했더니 펀드에 묶여서 어렵다, 아직 추가 모집이 안 끝났다, 수익률 더 좋은 다른 펀드로 갈아타는 게 낫다는 등 갖가지 핑계를 대며 돌려주지 않았고, 결국 수차례 동종 전과가 있던 B 씨는 카페의 다른 여자 회원들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여 수억 원을 가로챘다.


목적을 달성한 B 씨는 사기의 정석 대로 잠적을 했다.

사기당한 것을 안 그녀를 비롯한 회원들은 뒤늦게 고소를 했고, B 씨를 추적하는 수사팀은 각고의 노력을 했음에도 철저히 준비하고 튄(?) B 씨의 소재를 쉽게 파악할 수 없었다.


대출 이자는 계속 나가고, 그런 놈에게 당했다는 분함까지 참을 수 없었는데, 경찰 수사에 대해 불신까지 겹친 그녀는 경찰청장과의 대화방, 국민신문고 등 각종 민원기관에 민원을 넣기 시작했다.


담당 이 형사는 현재 지명수배하고 추적 중이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최선을 다하고 있다, 추적수사팀까지 동원되어서 추적 중이다라고 설명했음에도 그녀는 못 믿겠다, 경찰서장과 이야기하겠다 등등 막무가내였다.


수사팀장 정 경감까지 나서서 설명을 드렸음에도 그녀는 계속 경찰서장과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더 이상 대응이 어려웠던 정 팀장과 이 형사가 수사과장인 나를 찾아왔다.  


"과장님, 죄송합니다. A 씨가 서장님 면담 요청 민원을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어서요."

"괜찮아요.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일단 제가 직접 만나서 설명을 드릴 테니 찾아오라고 해주세요."


며칠 후 격앙된 그녀가 찾아왔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리 담당 이 형사, 정 팀장, 추적수사팀 하 팀장까지 입회를 시켰다.


"도대체 수사를 어떻게 하고 있는 건가요?", "대한민국 경찰이 이런 사기꾼 하나 못 잡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때 분명히 도망갈 것 같다고 미리 말씀드렸는데, 왜 못 잡은 건가요?"

등등 경찰 수사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잔뜩 늘어놓았다.


먼저 범인을 잡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를 드렸다.

그리고, 현재 이 자리에 있는 담당 팀뿐만 아니라 추적수사팀까지 동원하여 추적 중임에도 생활반응이라고 하는 휴대전화, 인터넷, 신용카드 사용 등 흔적을 남기지 않아 수사에 어려움이 있으나, 특기할 만한 단서가 있어 특수 수사기법으로 추적 중이라고 설명을 드렸다.


설명을 듣자 태도가 다소 누그러졌다.

추적 상황을 주기적으로 그녀에게 통보드리도록 이 형사에게 주지도 시키고, 더 신경 써서 추적하겠다고 말씀을 드리자 과장인 나만 믿고 있겠다며 돌아갔다.


그 후 몇 개월에 걸친 추적에도 불구하고 B 씨는 흔적이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 잡을 수 없었고, 그녀는 간간히 나에게 연락을 해와 추적 상황을 묻곤 했었다.


이듬해 4월.

정기 인사 발령으로 경찰서를 옮긴 나에게 그녀가 전화를 걸어왔다.

신경을 써 준 덕분에 B 씨가 검거되었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는 합의 관련 자문을 구했다.


내가 자문까지 해줄 입장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민원으로 만난 것도 인연(?)이라 생각하고, 상대방이 재산이 없으면 소송한다 해도 돈을 돌려받을 수 없다고 현실적인 조언을 해 드렸다.


구속되어 유치장에 수감된 B 씨를 면회하고 돌아온 그녀.

조언대로 돈 받을 길이 없다고 생각은 들었으나, 혹시나 자신의 돈만 갚아 주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과 대출금 변제에 따른 억울함 등으로 마음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다음 날 또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억울함, 사기당했다는 자괴감, 무기력 등 온갖 감정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듯했다.


힘들어하는 민원인들에게 들려 드리는 나만의 비법! 북극곰 이야기를 해드려야 할 것 같았다.


"혹시 북극곰 이야기 아세요?"

"네?? 북극곰요??"


"네~ 먼저 1분 동안 북극곰만 생각하세요. 그다음 1분 동안은 아무런 생각이나 다 하세요. 자 이제 1분 동안은 아무 생각이나 다 하되, '절대!' 북극곰은 생각하지 마세요!"


이렇게 실험을 하면 마지막 1분 동안은 바닷가에 가서 잔잔한 파도를 지켜보는 상상을 하다가도 저 멀리 떠 있는 배 위에 북극곰이 떠~억 하니 앉아 있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다시 차를 타고 드라이브 가는 상상을 하면 바로 옆 자리에 북극곰이 콜라를 마시며 창밖을 쳐다보고 있고, 다시 고개를 휘젓고 등산하는 상상을 하면 북극곰이 열심히 뚜벅뚜벅 뒤를 따라오게 된다.


즉, 생각의 억제와 욕구 사이에 반동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영어 원제: Ironic process theory, 역설적 과정이론)라고 하는 것으로, 특정 생각, 욕구를 억누르려 하면 할수록 그것이 떠오르기 쉽게 되는 효과인데, 연예인들이 악플 등으로 인해 자살하는 경우에도 이 효과 때문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악플을 보지 않아야 함에도 계속 오늘은 무슨 댓글이 달렸나... 하고 굳이 찾아가서 악플을 확인하고 상처받고 하다가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북극곰 이야기를 들려주며, B 씨는 사기에 합당한 처벌을 받을 테니 신경 그만 쓰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더 좋을 것 같다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해 드렸다.


귀에 쏙쏙 박히는 말씀 감사하다며 오늘 부로 깨끗이 잊고, 북극곰 같은 그놈(?) 생각하지 않도록 해 보겠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마음만이라도 시원~하게 정리했는지 그 후로 연락이 없었다.



해결되지 않는 힘든 일이 있으신가요?

북극곰처럼 생각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정신을 갉아먹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북극곰은 그냥 북극에서 생활하도록 놓아주시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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