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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에바 Chaeva Aug 12. 2020

백수 말고 <업글인간>이라고 불러주세요

비루하지만, 나는 어제보다 행복한 오늘의 내가 되기로 했다.



 <코끼리의 족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코끼리를 훈련시킬  힘이 없는 아기 코끼리일 때부터 발에 강력한 족쇄를 묶어둔다. 그러면 족쇄에 발이 묶여 아기 코끼리가 제멋대로 가려고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코끼리가 크고 힘이  어른 코끼리가 되어도 어린 시절의 족쇄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족쇄를 풀고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한다. 제지를 당한 기억과 경험에 의해 타인에 의한 속박이 스스로에 의한 속박이 되는 것이다.



 유학을 미룬 후의 내 상황이 마치 어린 시절 족쇄의 기억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코끼리가 된 것 같았다. 항상 남이 준 과제와 목표를 해내기 위해 달리다가 갑자기 나에게 제약을 가하던 것들이 사라진다니. 후련함을 느끼긴커녕 타인이, 사회가 정한 '가야 할 길' 위에서 나 혼자 방향을 잃은 장님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누구는 자신과 조우하게 되면 비로소 해방감을 느끼고 진정한 자아를 찾게 된다는데 족쇄에 익숙해져 버린 아기 코끼리 상태에서 그대로 커버린 24살의 나는 역설적이게도 주어진 삶의 과제들의 해방에서 갑갑함을 느꼈다.

 모두에게서 <프랑스 미술 대학에 합격한 나>를 축하하는 인사치레가 끊이지 않았던 사람에서 갑자기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한국에서 '착한 딸'로 태어나 어른이 되기 전에는 수능을 위한 공부, 어른이 된 후에는 대학에 가고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기 위해 항상 목표를 눈 앞에 두고 아등바등 살았던 인생에서 처음으로 혼자가 된 것이다.


 그렇게 몇 달 간의 자기혐오와 무기력감의 굴레에 갇혔다. 특히나 완벽을 추구하는 이기적 완벽주의 때문에 나는 철저히 나를 감시했고, 검열했다. 나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완벽을 추구하는 태도는 엉뚱하게도 스스로를 혐오하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나'에 대한 분노는 '나'를 망가뜨렸고 무기력하게 했다. 내가 망가져 가는 것을 느끼니 완벽에 대한 갈망은 더 심해졌고 자기혐오도 심해졌었다. 완벽주의가 무기력을 낳았고 무기력이 완벽주의 강박을 낳았다.


 소용돌이 같은 자기혐오에 빠져있다가 문득, 이러다간 정말 죽겠지 싶었다. 완벽주의에 실낱같은 희망같은 좋은 점이 딱 하나 있다면, 절대 스스로를 포기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포기 하는 것만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잘 살아보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보잘 것 없는 나지만 행복한 <업글인간>이 되기로 했다.


 업글인간. 우연한 계기로 만난 이 단어는 '업그레이드 인간'의 줄임말로, 성공보다 성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그럼 여기서, 업글인간을 정의하는 성공과 성장의 차이는 뭘까? 성공하며 성장하는 사람도 있고 성장하며 성공하는 사람도 있을텐데 그 둘을 굳이 왜 대조를 시킨 것일까?


 무언가 성취한다는 점에서 둘은 비슷해보이지만, 업글인간을 정의하는 데 쓰인 성공과 성장의 차이는 확연하다. 성공은 개인의 행복이나 욕망에 상관없이 사회가 기대하는 개인의 역량이지만 성장은 개인이 스스로를 돌봄으로써 생겨나는 행복이다. 스펙, 취직, 결혼, 출산처럼 사회가 주입시킨 목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와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다.






 유학을 포기한 나는, 최종학력은 고졸에, 남들은 취업과 인턴을 알아볼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우울과 무기력에 스스로를 증오하던 겁쟁이다.

 한심하고 별 거 없지만, 그래도 내게 행복할 자격은 있지 않은가.


 그런 연유로, 행복해지기 위해 성장하기로 결심했다.


 가장 먼저, 완벽하지 않은 나도 나로 인정하기로 했다. 어차피 인간이라는 존재로 태어난 이상 완벽해질 수는 없다. 인간 뿐 아니라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애초에 아무도 나에게 완벽한 모습을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완벽해지길 바라는 것은 오로지 '나'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완벽을 갈망하던, 난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남들은 못하지만 나만이 할 수 있는 분명한 것이 있다. 그건 나를 온전히 사랑해주는 것이다. 내가 실수를 해도, 남들처럼 잘나지 못하고, 가끔은 이기적이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나를 대가 없이 사랑하고 보듬는 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과거의 내가 나에게 완벽주의를 추구했던 만큼 앞으로는 나를 아껴주고 존중하고 사랑해 줄 것을, 그리고 나의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나의 생각에 귀 기울일 것을 다짐하게 되었다.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시작한 후, 나의 목표도 조금 낮추었다. 성장을 위해 무조건 높은 목표를 설정할 필요도 없거니와 완벽주의가 만든 비현실적으로 높은 목표는 나의 자기혐오를 가속화시킨 요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성장하지만, 그 성장은 하루아침에 기적처럼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이런 소소한 질문들을 매일의 나에게 던졌다.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열심히 살았는가?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더 건강하게 움직였는가?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더 지식을 얻었는가?>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처럼, 어제보다 열심히 산 나, 어제보다 더 건강히 움직인 나, 어제보다 더 많은 지식을 얻은 나, 어제보다 보람차고 가치있는 삶을 산 <나>들이 매일 쌓이면 며칠, 몇 주, 몇 달, 몇 년 후의 나는 이런 고찰을 최초로 시작했을 무렵의 나보다 월등히 성장한 <나>가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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