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어린이가 된다는 기적
『어린왕자 』, 생텍쥐베리
‘마르셀리노의 기적’이란 영화가 있다. 수도원에서 살고있던 고아 마르세리노에게 예수님이 발현한다는 신비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삼십 년 전에 보았던 흑백 영화지만 지금껏 마음이 정화되는 영화로 기억되고 있다.
소망이 투영된 기적은 양날의 칼이다. 일단은 놀라움 하나만으로도 기적으로 인정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기적의 또다른 칼날은 혹세무민의 흉기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가톨릭의 경우는 신비한 현상을 오랜에 걸쳐 면밀하게 살펴본 후, 가치와 객관성이 입증되는 경우에만 기적으로 인정한다.
신기한 것은 가톨릭에서 공인받은 기적의 체험자 대부분이 어린이라는 점이다. 어린 시절은 투명한 계곡물과 같으니, 반짝이는 물비늘 아래 모래와 잔돌까지 순결해 보이는 영롱한 인생의 계절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천국은 아이들과 같아야 갈 수 있다고 했다.
순수한 영혼만이 입장할 수 있다는 천국은 어디에 있을까? 동화 『파랑새』에서 틸틸과 미틸은 행복을 찾아 떠난다. 그들이 찾고 다녔던 행복의 파랑새는 다른 곳이 아닌 자신의 집에 있었다. 이처럼 천국은 먼 곳이 아닌 바로 우리 곁에 있다.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는 순수를 잃어버린 어른을 위한 동화다. '어린왕자'하면 법정 스님이 먼저 떠오른다. 스님의 어린 왕자 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다. 무려 마흔 번이 넘도록 읽었다고 한다. 스님은 ‘어린 왕자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수필에서 누군가 자신에게 딱 두 권의 책을 선택하라면 『화엄경 』,『어린왕자 』를 고를 것이라 했다. 보성 대원사에는 법정 스님의 정신을 기리는 어린 왕자 선(禪) 문학관이 있다.
언젠가 어느 독서 모임에서 『어린왕자 』를 읽고 감동했다는 꼬마는 위험하다고 말했다. 다들 웃었지만, 진심이었다. 『어린왕자 』는 어른을 위한 영혼의 매뉴얼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쉽게 감동하고 이해할 내용은 아니다. 생텍쥐베리는 레옹 베르트에게 “예전의, 어린아이였을 때의 그에게 이 책을 바치기로 하겠다.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다.”라고 적고 있다. 몸만 커버린 미숙한 영혼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어린 시절, 유명하다는 말에 끌려 『어린왕자 』를 처음 읽게 되었다. 하지만 보아뱀 이야기 말고는 나머지 내용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보다 오히려 삽화에 눈이 끌었는지, 한동안 따라 그렸던 기억이 새롭다. 『어린왕자』와의 첫 만남은 어설펐는데도, 마치 다 알고는 책인 듯 헛소리를 했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가면 쓴 어른이 된 것이다.
마흔 고개를 넘어갈 무렵, 법정 스님의 『어린왕자 』사랑에 자극을 받아서 다시 읽게 되었다. 초등학생 때 읽었던 어린 왕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하늘이 잔뜩 흐렸던 어느 한적한 카페에서 책을 펼친 채, 세 시간가량내용에 몰입을 했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무렵, 마음을 가렸던 비늘 하나가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 후로도 내 영혼의 샘이 고갈됨 이이 느껴질 때마다 『어린왕자 』를 읽었다. 그럴 때면 메마른 샘에는 맑은 물이 곤 했다.
몇 해 전 겨울, 기괴한 일로 순천에 내려갔을 때도 『어린왕자 』를 가방에 담았다. 엉킨 실타래를 풀 길은 보이지 많았고 감정정리도 쉽지 않았다. 한동안 순천에서 지내면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골치가 아팠다. 하루는 율촌면에 있는 작은 목욕탕 휴게실에서 『어린왕자 』를 읽었다. 목욕을 마친 상쾌함 때문일까? 어린왕자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들려왔다.
“난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나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너의 장미가 그토록 소중하게 된 것은 내가 그 꽃을 위해 공들인 시간 때문이다”
“조금 좋아한다는 것은 절대 사랑일 수 없어 너무 쉽게 사랑한다고 하지 마. 사랑한다는 말은 진실을 위해 아껴야 해”
눈에 익었던 활자들이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건네왔다. 나의 정성과 사연이 들어간 꽃은 수천 개의 장미꽃 가운데서 단 한 송이라는 내용과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했던 ‘길들이다’의 말뜻이 마치 홀로그램처럼 내게 와 닿았다. 마음을 안개처럼 뒤덮었던 고민도 한결 가벼워졌다.
책에 실려있는 생텍쥐베리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비행 조종사 모자를 쓰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흑백사진이다. 그는 항공우편물 배달부도 했는데, 언젠가 리비아 근처 사막에 불시착한 경험을 바탕으로 『어린왕자 』를 썼다고 한다. 세계 2차 대전에 징집된 생텍쥐베리는 1944년에 출격했다가 하늘에서 사라져 버렸다. 별이 된 어린 왕자처럼.
생떽쥐베리의 마지막 정황이 2008년에 알려졌다. 89세의 독일인 ‘호르스트 리베르트’는 자신이 생텍쥐베리의 비행기를 피격했다고 고백했다. 당시 그는 자신이 격추시킨 비행기 조종사가 누군지 몰랐다고 했다. 훗날 자신도 어린 왕자를 좋아했다면서 죄책감으로 힘들었다고 했다. 만약에 어느 별에서 생텍쥐베리가 그를 만난다면 뭐라고 할까? 아마도 고개 숙인 그의 어깨를 툭툭 때리며 크게 웃을 것만 같다.
『어린왕자 』서문에서 생텍쥐베리가 레옹 베르트에게 말한 것처럼 어른이 다시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했던 성철스님의 말처럼 세상 분별을 내려 놓아야한다. 그렇게 분별이 사라진 그 마음 자리에서 기적의 꽃이 피어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