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후박나무 아래로.
『간다, 봐라』, 법정스님 유고집-
강남 봉은사에서 조계종 승려들의 폭력에 대한 보도를 보았다. 이들은 총무원장 선거의 불법성에 항의하며, 일인 시위를 하던 조계종 노조원에게 인분까지 뿌렸다니 할 말을 잃게 한다. 깊은 속사정은 모르겠으나, 부처님이 보시면 혀를 찰 일이다. 탁한 물에서 피어나는 연꽃은커녕 그냥 흙탕물이 되고 마는 불교의 현실이 안타깝다.
이런 말세 시절, 비구 법정의 꼿꼿했던 삶과 카랑카랑한 육성이 그리워진다. 2010년 개나리 피던 봄날 세수 78세로 법정 스님은 길상사에서 이생의 육신을 벗었다. 스님께서 입적했다는 방송보도를 접한 나는 다비식 당일, 우리 집 아이들과 함께 토요일 늦은 오후에 승보사찰 송광사로 향했다.
조계산에 도착해 보니, 다비식이 거행된 산자락에선 스님의 육신이 잔불이 되어 연기로 오르고 있었다.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독경 소리도 산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소멸해 가는 육신을 바라보는 조문객의 표정에는 무상함에 젖어있었다.
몇 해 전에 법정 스님의 미발표 원고를 중심으로 엮은 책 『간다, 봐라』가 출간되었다. 책의 제목은 스님께서 사바세계에 남긴 마지막 말이라고 전한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미련 없이 삼켰듯, 스님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간다. 봐라”라는 말과 함께 삶의 강을 넘어가셨다.
이 책은 법정 스님의 생애를 몇 개의 범주로 나누고 있다. 목차는 ‘산거 일기’, ‘자연. 대지. 생명’, ‘홀로 있기. 침묵. 말’, ‘무소유’, ‘차(茶)’, ‘사랑. 자기 포기. 섬김’, ‘미발표 글’ 그리고 부록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게다가 스님의 철저했던 수행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사진들과 메모, 원고지도 큰 선물이다.
“시냇물 소리 베고 자다가 4시에 기상. 새벽녘에는 추워서 잠들지 못했다. 아궁이 고치는 사람이 큰 방 일을 해보지 않은 듯~ 5.31 (월) 맑음.” ‘산거 일기’에 실려있는 일기 내용이다. 법정이 머물렀던 강원도 산골 오두막은 깊은 오지인 탓에, 5월 하순에도 새벽 추위가 대단했었던 모양이다. 요즘 따뜻한 아파트를 토굴이라 부르며 수행한다는 일부 승려들이 있다는 풍문도 있다. 수행이 그런 것인지 묻고 싶다.
오래전 ‘맑고 향기롭게’에서 주최한 법정 스님의 강연회에 갔었다. 그날 스님은 말의 절제에 대하여 강조했었다. “침묵을 만들어내는 것은 소리의 사라짐이 아니라 귀를 기울이는 자질, 공간에 생명을 부여하는 존재의 가벼움 맥박이다.”라는 책 속의 글을 보면서 그날의 설법이 떠오른다. 마음이 맑았던 법회였다.
비구(比丘:남자 승려) 법정은 송광사에 적을 두었다. 법정에게 출가란 존재의 근본을 찾는 일이었으며 ‘명상 수행’은 그 답을 찾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간다, 봐라』에서는 명상에 대한 스님의 사유가 잘 나타난다.
스님의 수행 정신은 ‘무소유’로 상징할 수 있다. 법정 스님의 대표 수필집 『무소유』는 우리 시대 에세이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스님의 무소유 삶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실험적 삶을 살았던 콩코드 호숫가의 작은 통나무집과 닮았다고 한다
『간다, 봐라』의 ‘추운 밤, 손님이 오니’에서는 법정 스님의 새로운 면목을 알 수 있었는데, 스님과 차(茶)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 사회에도 한때 녹차를 많이 찾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브랜드 소비 성향에 따른 커피의 소비가 많은 사회가 되어서 아쉽다. 스님은 수행의 방편으로써 차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인(茶人)은 마음의 수행이 근본이다. 일신의 도를 위해 바친 다인이라면 이 수행을 소홀히 할 수 없다.”
법정 스님의 서릿발 같은 기운은 스님의 사진에서도 풍겨온다. 이는 오랜 세월 철저한 수행승에게서 풍기는 그런 것이리라. 하지만 ‘꽃이 향기를 뿜듯’ 편에서는 스님의 따뜻한 속정도 드러난다. 자신에겐 철저했지만, 이웃들에게 자비로웠던 법정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한때 스님의 신간이 서점에 도착하는 날이면 적금 타는 날처럼 설레었다. 스님의 수필집을 음미하듯 읽었던 시절이었다. 참으로 행복한 독서였다. 혹자들은 법정의 책을 일컬어 ‘힐링 도서’라 폄훼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지금도 내 서재엔 법정스님의 책들이 세트처럼 자리하고 있다. 특히. 1989년판『무소유』와 1987년판 『산방한담』은 지금껏 아끼는 스님의 수필집이자, 삶의 나침판이다.
법정 스님이 입적한 후 독자들의 그리움과 출판계의 아쉬움(?)이 교묘하게 맞물려 후일담을 소재로 한 책들이 꽤나 출판되었다. 『간다, 봐라』또한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했다는 인상은 지울 수는 없다. 스님께서는 ‘다시는 나의 책을 출판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따라서 스님의 이름을 빌린 책들의 출간은 멈춰야 마땅하다. 법정 스님의 수행과 글에 욕될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부디, 『간다, 봐라』로써 법정 스님의 이름으로 된 마지막 책이기를 바란다. ‘무소유’의 정신이란 욕망을 걷고, 맑은 영혼을 찾는 수행이 아니던가? 이번 가을에 스님의 책을 옆에 끼고 불일암에 가보련다. 그곳에는 스님의 유해가 뿌려진 후박나무와 낮은 의자가 있다. 그 의자에 앉아서 한동안 조계산 자락을 바라보고 싶다. 가을은 스님을 그리워하기에 좋은 계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