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위한 진혼곡

화개의 인생 순례기10

by 박신호

#1

천봉산 대원사로 향한다. 대원사 아미타 동산에는 아버지의 육신이 영면하고 계신다. 아버지께서 생을 마무리했던 사월은 푸르렀고 아침햇살은 고요했다. 수화기 너머로 “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같아야”라는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말이다.


어머니의 비명만큼이나 내 머릿속은 아득했지만, 마음은 차분했다. 그 무렵 아버지의 죽음을 강하게 예감했던 탓일까. 주말이 되면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목욕시켜 드렸다. 아버지의 육신을 밀고 끌면서 욕실에 들어서면 정해진 의식처럼 당신의 고단한 몸의 때를 밀어드렸다. 그럴때마다 아버지 등에는 저승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목욕 시간이면 남 말하듯, 사후(死後)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내 손동작에 이끌리어 이리저리 몸을 흔들면서 무겁게 듣고 계셨다. 이생에서의 장애라는 고통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셨던 아버지는 간혹 길게 ~휴 하는 숨을 토하시곤 했다. 이따금 “죽고 싶다”라는 아버지의 말은 신께 바치는 간절한 기도였다.


아버지의 육신은 눈처럼 하얗고 차가웠다. 창백한 육신을 흰 가운으로 덮기 전, 당신의 귀에 대고 이렇게 말씀드렸다. “아버지 편히 가시고요.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제가 잘 모실게요. 염려 마세요. 잠시 후, 빛이 올 겁니다. 그 빛을 놓치지 말고 따라가셔야 합니다. 잊지 마세요. 빛을”이라고. 금방 온기를 잃어가는 아버지의 손과 발을 만지면서 올리는 내 목소리는 심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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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만발한 국화꽃 사이에서 아버지는 미소를 짓고 계셨다. 낯선 미소였다. 온갖 통증과 욕창과의 긴장, 쌓여가는 약봉지와 대소변 처리 속에서 힘겨워하셨던 아버지에게 웃음은 낯선 감정이었다. 영정 사진 속에 아버지는 허허롭게 웃고 계신다. 걷지 못하는 참혹함으로 삶을 관통 당하셨던 한 생애. 사진 속 망자(亡者) 미소는 모순이었다.


조문객과 가족들마저 모두 돌아간 깊은 저녁, 텅 빈 영안실을 가득 채운 것은 촛불이었다. 적막함 속에서 아버지의 사진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아버지 진짜 고생하셨네요. 당신께서 살아있는 절반의 육신으로 가장의 의무를 다하고자 노심초사하셨습니다. 제가 사람 노릇 할 수 있었음도 아버지 덕분입니다. 감사드립니다.” 너울대는 촛불의 그림자 아래서 감사의 독백을 나지막하게 올렸다.


장례 기간 내내 도무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두 눈이 퉁퉁 불었던 여동생들은 질책하듯 나를 향해 흘끔흘끔 눈치를 보내고 있었다. 왜 눈물이 나지 않았을까? 마음은 슬픔으로 출렁이고 있었는데 말이다. 장자의 ‘호접몽’까지는 아니더라도 무거운 육신의 사슬을 벗으시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을 아버지를 상상했다면 불효일까?


장애인(障礙人). 우리는 이들이 감당해야 하는 일상의 제약과 세상의 무거운 시선을 알 수 있을까? ‘장애인(障礙人) 가장(家長)’. 이 말이 의미하는 나락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을까? 가족의 참담함을 상상할 수 있을까? 자동차에 타신 아버지께서는 빙판으로 변한 도로에서 절벽으로 추락하는 순간 하반신 마비라는 당신의 운명을 짐작이나 했을까?


#3

37년 전, 아버지께서 사고를 당한 날은 정월 초 맹추위 한복판이었다. 해남병원에서 출발하여 전남대병원까지 구급차는 빙판길을 설설 기어갔다. 결국 나주 부근에 있는 고갯마루를 넘지 못한 채 허덕였다. 전남대병원 구급차가 고개 넘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몇몇 장정들이 아버지를 들것에 눕힌 채 눈 쌓인 고개를 넘었다. 그날의 짙은 어둠과 저주스럽던 하얀 눈발을 어찌 잊겠는가?


아버지 옆에서 꼬박 밤을 새웠던 응급실에서의 새벽이 생각난다. 절망스럽던 병원 냄새 속에서도 날은 밝아오고 있었다. 어느 목사님께서 응급실 환자들에게 기도를 해주고 계셨다. 나도 그분에게 기도를 부탁드렸다. 애잔한 눈빛으로 나를 보시던 그분은 손을 꽉 잡으시고 정성껏 기도를 올려주셨다. 결국 아버지는 흉추 3번 신경절단이라는 판정을 받으셨다. 욕창에 주의하라는 의사의 말에 따라 두 시간 단위로 아버지 자세를 바꿔주면서 밤새 졸음과 싸우다 보면 어느새 병원에서 제공하는 아침 식사가 들어오곤 했다.


장애인 전용 오토바이를 처음 운전하신 아버지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자가용인 마냥 정성껏 매일 세차 하셨다. 어느 날 학교 가려는 나에게 아버지는 오토바이로 태워주겠다고 하셨다. 순간, 마음 한편에선 거부감이 들었지만, 기쁜 표정으로 뒷자리에 올라탔다. 처음으로 장애인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서 달리는데, 왜 그리 가슴은 먹먹하던지...


훗날 아버지는 장애인 자동차도 운전하시게 되었다. 물론 면허 취득은 쉽지 않았다. 풍암동 면허시험장 삼 층까지 아버지를 업고 다녔던 추억이 새롭다. 주행시험을 마치고 합격의 파란불이 들어오자 주변의 응시생들이 우리 부자에게 박수를 보내며 축하해 주었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단 한 번 만에 합격했다고 모처럼 환한 얼굴로 기고만장하셨다.

아버지는 장애인이 된 순간부터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모든 사회 행위로부터 격리되었다. 당신은 생전에 제대로 된 건강 검진을 한 번도 받을 수 없었다. 방사선 촬영이나 위내시경 검사를 받을 때면 몇 사람이 달려들어야 했다. 아버지에게 건강 검진이란 일상인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행운이었다. 장애인에게 허락된 유일한 권리는 ‘인내’ 뿐이다.


#4

어머니는 남편과 자녀들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 여겼다. 세월은 어머니의 육신과 정신을 깊게 마모시켰고, 삶이 버거울 때면 아버지에게 짜증을 퍼붓곤 했다. 이럴 때면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의 화를 순하게 받아드렸다. 언제나 불안한 얼굴로 ‘나 말고 누가 하겠냐’며 반평생 아버지의 수족이 되어 숨 가쁜 삶을 사셨던 어머니. 이제 어머니는 매일 경로당에 출근하시면서 뒤늦은 인생의 방학을 보내고 계신다.


얼마 전, 어머니는 성당의 한 교우 장례미사에 참석했다가 펑펑 우셨다고 한다. 아버지 죽음 후, 슬픈 노래를 듣기 싫어했던 어머니는 장례미사 시작과 더불어 망자(亡者)를 위한 슬픈 곡조의 성가(聖歌)가 연주되자 느닷없이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반평생 아이처럼 돌보았던 남편이 긴 한숨 내쉬고 저편으로 가신 후, 마음 가득 고였던 한과 슬픔 그리고 미안함이 동시에 터진 것이었다. 이제 어머니는 아버지가 안 계신 보금자리에서 홀로 식사를 하신다. 벌써 여러 해가 되어간다.


사시는 동안, 두 분이 감당하기에 가장 고약했던 시간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심장 부근 아래부터는 감각이 없었다. 당연히 대소변을 스스로 볼 수 없었다. 그 처리는 항상 어머니의 몫이었다. 사흘마다 두 분은 비닐장갑과 바세린을 준비하고 신문지를 깔고서 민망한 거사를 치르곤 했다. 그때마다 나와 동생들은 침묵했다. 잠시 후, 어머니는 신문지를 둘둘 말아 나오셨다. 실내 환기 끝났어도 우리들의 침묵은 길어졌다.


평소 친분 있던 어느 목사님께서는 내게 ‘장애인의 대변을 손으로 파내는 간병인도 고생이지만, 항문을 내맡기는 그 마음도 한번 헤아려 보라’고 하셨다. 구린내 속에서 변을 빼내던 어머니의 얼굴과 눈을 감고 입술을 꽉 다무셨던 아버지의 서러운 얼굴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그렇게 사셨다. 그 와중에 자녀 셋을 모두 대학까지 가르치셨고, 짝도 찾아주셨다.


#5

아버지께서는 ‘장애인의 삶’이란 고된 인생 수업을 모두 마치고, 태산준령을 넘어서 본향(本鄕)으로 훌훌 날아가셨다. 대원사 아미타 동산에서 영가 탑에 앞에 앉는다. 그 자리에 머물면 아버지는 ‘어디에 계실까?’ 궁금해진다. 또 가족이란 불가해한 인연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게 된다.


차례상에 놓이는 지방(紙榜)에는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가 쓰여 있다. ‘학생’이란 표현이 참 좋다. 어찌 보면 우리는 삶을 배우기 위하여 인간으로 온 유학생일지도 모를 일이다. 살면서 겪는 ‘희로애락’은 우리가 배워야만 하는 수업 내용은 아닐까?


술을 따르면서 아버지께 여쭙는다. “공부 열심히 했다고 그곳에서 칭찬받으셨지요”라고. 길어지는 산 그림자를 뚫고 산새들은 무심하게 운다. 계곡 물소리도 변함없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봄이 지나간 세상에는 여름이 조용히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