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울 탈 출 기

< OB-LA-DI, OB-LA-DA > , Beatles

by 박신호

마음에 틈이 생기는 여유로운 주말 아침. 식구들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창가에 들어오는 햇살이 얼굴을 내민다. 고요가 적막함으로 변할 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본다. “오브라디 오브라다(OB-LA-DI, OB-LA-DA) 인생은 흘러가는 것. 라라~ 인생은 흘러가는 것” 비틀스 음악이다. 노래 속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국민(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당시 삼십 대 초반의 아버지는 보성에서 자그마한 ‘시계방(時計房)’을 하고 계셨다. 지금은 ‘시계방’란 단어도 사전에 없을 것 같다. 쉽게 말해서 시계를 팔고, 수리해 주는 곳이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 이사를 결정하셨다. 서울특별시로 말이다. 세월이 꽤 흐른 뒤, 아버지께 왜 이사를 결심했냐고 여쭈었더니, 나와 여동생들의 교육 때문이었다며 희미하게 답하셨다.

7살이었던 나와 두 살 터울 어린 여동생 둘, 그리고 젊으셨던 어머니는 장차 서울에서 겪게 될 고생을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그저 요즘 말로 ‘in seoul’ 한다는 막연한 들뜸과 불안이 겹치는 혼란 속에서 밤새 짐을 꾸렸다.


그날 저녁 흐릿했던 불빛과 커다란 밤색 여행용 가방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40대 기수론을 외쳤던 김대중이 박정희에게 석패했던 1971년 가을이었다.


서울역에 도착한 우리에게 서울의 아침은 ‘경이와 경악’이었다. 서울역 광장 가득 찬 차량 물결, 건너편에 서 있던 높은 빌딩 숲. 그리고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육교. 신기함을 넘어서 생존에 대한 두려움마저 밀려왔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우리가 살게 될 전셋집이었다.

내가 볼 때도 우리 여섯 식구가 제대로 몸을 누일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종업원으로 따라온 눈이 커다란 규식이 형 얼굴도 해쓱해졌다. 방 하나와 딸린 작은 부엌. 화장실은 공동 사용. 뭔가 잘못된 기분은 나만은 아니었는지, 막내 동생을 업고 있던 어머니의 어깨도 늘어진 장마전선처럼 처져있었다.

아버지가 개업한 시계방에도 가보았다. 역시나 전셋집만큼이나 실망스러웠다. 보성에서의 시계방과 비교해 볼 때 하품도 나오지 않을 만큼 작았으며, 주변에 통행하는 사람들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식구들은 “그래 여긴 서울이다. 정신 차리고 살면 될 거야”라고 위로하면서 몸을 뒤척이며 서울에서의 첫날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벌써 오십 년도 넘은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시계업은 도통 미덥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계에 대한 근심하게 되었다. 막연했던 불안은 차츰 현실로 변해갔고 아버지의 흡연과 한숨은 늘었고 잦았다. 종업원으로 함께 상경했던 규식이 형도 월급에 대한 불안으로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는 이곳에서 일 년을 채 못 버티고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했다.


어느 시장 골목으로 기억이 된다. 그곳에서 형편은 조금 나아졌는지 아버지가 퇴근할 무렵이면, 우리 식구는 밤마실 삼아 사거리에 있던 육교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곤 했다. 그때 내려다보았던 육교 밑 숱한 차량의 길고 긴 불빛 행렬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육교에 서서 밤바람을 쐬고 있다 보면, 젊은 아버지께서 과자를 들고 환한 얼굴로 걸어오고 계셨다.


얼마 뒤, 아버지께서는 또다시 가게를 구해야 했다. 우리 식구들은 하루 종일 복덕방을 전전하면서 우리를 품어줄 집주인을 찾아다녔다. 그 당시 우리를 데리고 발품을 파시던 부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지금 헤아려봐도 마음이 먹먹해진다. 이런 와중에도 허기를 면하고자 먹었던 가락국수 맛은 지금도 선명하다. 다행히 우리 식구들은 새로운 시계방과 머물만한 전셋집을 어렵게 구할 수 있었다.


새로운 전셋집에 살면서 어머니는 “얏! 조용해, 주인집에서 할머니가 나오단 말이야!”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생애 처음으로 남의 기분을 헤아릴 줄 알게 되었다. ‘눈치’를 보게 되면 철든다고 하던가? 아무튼 눈칫밥을 알게 된 그곳은 왕십리 부근이었다.


왕십리 큰 도로변에 새로 개업한 아버지의 시계방은 제법 깨끗하고 넓었다. 문제는 오가는 인파들이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눈이 컸던 규식이 형이 보이지 않았다. 고향이 완도였던 규식이 형은 몇 해 뒤, 그곳 완도에서 우리 식구들과 재회를 하게 된다. 규식이 형은 다시 우리 집에서 일을 하게 된다.

아버지는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셨다. 라디오 음악 채널에 주파수를 맞춰놓고 따라 부르거나 휘파람을 부시곤 했다. 제법 추운 겨울이었는데, 손님이 없는 아버지 시계 점포에서는 내가 처음 듣는 경쾌한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어린 나로서는 제목도, 내용도 알 수 없는 외국 음악이었다. 하지만 이 노래는 기억에 박힌 사금파리처럼 또렷하기만 하다. 특히 반복되던 “오브라디 오브라다OB-LA-DI, OB-LA-DA”라는 외국말이 주문처럼 들렸다.


지금은 전설이 된 비틀스 노래가 아버지 시계방에 있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지금껏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빠른 템포로 ‘딴따라 딴딴 딴딴~’의 반복음으로 시작되는 ‘OB-LA-DI, OB-LA-DA’는 돈벌이로 마음이 지쳐가던 아버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위로이자 즐거움이었나 보다. 집에 와서도 ‘OB-LA-DI, OB-LA-DA’를 휘파람으로 부시던 아버지의 젊은 얼굴이 엊그제 일처럼 또렷하다.


결국 아버지는 연이은 실패로 시계방을 접으셨다. 그 후 아버지는 택시, 요식업, 세탁소 등으로 업종을 바꿔가면서 힘든 서울살이를 견디셨다. 우리가 살던 집은 아버지 직업이 바뀔 때마다 점점 더 초라해졌다.


고생하는 형님을 더는 볼 수 없었던 완도 작은아버지께서 마침내 상경했다. 당시 휘경동에서 세탁소를 하시던 아버지는 새벽까지 이어진 작은아버지의 간곡한 설득을 따르기로 하셨다. 고단했던 서울살이는 작은아버지 덕분에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곧 이사한다. 이번엔 완도야. 작은아버지께서 도와주실 것이라 했다. 다음 달까지만 학교를 가고 완도로 전학 가야 해.”라고 말씀하시는 어머니 얼굴은 모처럼 편안해 보였다. 서울살이 오 년 동안 이사를 무려 8~9번 다녔다. 나도 입학 후부터 모두 아홉 군데의 학교를 전전했으니 꽤나 피곤한 어린 시절을 보낸 셈이다.


우리 식구가 완도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던 그해 여름은 대통령 부인이 광복절 기념식에서 총을 맞아 사망했다고 전 국민이 펑펑 울었던 1975년 8월 15일 광복절이었다.


드디어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고향 땅 전라도로 향하는 우리 식구는 고단한 군대를 막 제대한 전역병 같았다. 지독한 악몽의 터널을 벗어나는 기분이라 할까.


늦은 저녁 광주에 도착한 우리는 역 부근 여관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여관 주인은 방이 없노라며 종업원이 사용했던 방도 괜찮냐고 물었고, 아버지는 안심하는 얼굴로 동의했다. 여관 주인 또한 갈 곳 없는 늦은 객들을 배려할 수 있어서 기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그 방엔 전축이 있으니 듣고 싶으면 들으세요. 소리만 작게 하시고요"라고

종업원이 안내한 그 방에는 제법 큰 전축(오디오)과 수십 장의 LP음반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비틀스의 음반을 집더니 좋아했던 ‘OB-LA-DI, OB-LA-DA’를 틀었다. ‘평화여관’이란 이름만큼이나 평화로웠던 1975년 초가을 저녁이었다.


1971년 서울 왕십리. 그때를 생각하면 고단해 보였던 아버지의 뒷모습과 노래를 흥얼거리시던 장면이 겹친다. 아무튼 신나는 비틀스의 선율처럼 오늘도 ‘희망’이란 눈부신 햇살이 세상의 모든 ‘데스몬드’와 ‘몰리’들에게 가득하기를 소망한다. 어떻게든 인생은 흘러가는 법이니, 부디 파이팅! 하시라.



<OB-LA-DI, OB-LA-DA>, the Beatles


“Happy ever after in the market place, Molly lets the children lend a hand. Desmond stays at home and does his pretty face, And in the evening she still sings it with the band

시장에서 행복한 삶을 꾸리며 사는 동안, ‘몰리’는 아이들에게 가게를 돕도록 했고,

‘데스몬드’는 집에서 그 예쁜 얼굴에 화장을 하고서 저녁마다 밴드와 함께 노래를 했네.


Ob-la-di, ob-la-da, life goes on, bra! La la how the life goes on. If you want some fun, take obladi-oblada.

오브라디 오브라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 라라 인생은 흘러가는 것.

재미나게 살고 싶다면 오브라디 오브라다를 외쳐보세요.”


Desmond takes a trolly to thejewellers stores

Buys a twenty carat golden ring

Takes it back to Molly waiting at the door

And as he gives it to her she begins to sing.

Obladi oblada life goes on bra Lala how the life goes on

Obladi Oblada life goes on bra Lala how the life goes on.

In a couple of years they have built A home sweet home

With a couple of kids running in the yard

Of Desmond and Molly Jones.

데즈먼은 몰리를 보석상에 데려가서 20캐럿짜리 금반지를 사서

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몰리에게 다시 갔어요

그리고 반지를그녀에서 주자 그녀는노래하기 시작했어요

오블라디, 오블라다 삶은 계속되지요

라라라 인생은 흘러가요 오블라디, 오블라다 삶은 계속되지요

라라라 인생은 흘러가요

1, 2년이 지나고 나서 그들은 아늑한 집을 지었어요

그리고 두 아이들은 마당에서 뛰놀고 있어요

존스 부부네 집에서요


(이하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