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성물(聖物)

『무지의 구름』, 어느 무명의 신비가

by 박신호

피정을 신청했다. 일상을 떠나 고요 속으로 들어가는 피정(避靜)은 가톨릭 대표 신행이다. 사찰 수행으로 널리 알려진 템플스테이와 유사하다. 이번에 신청한 피정 장소는 남평에 있는 글라렛 수도원이다. 가끔 남평을 갈 때마다 글라렛수도원’이라는 이정표를 눈에 새겨두었다.


피정을 떠나는 이유는 다양하다. 어떤 이는 기도에 몰입하고자, 또 다른 이는 세상 번뇌를 떨치기 위해서, 그냥 편안한 힐링이 목적인 경우도 있다. 이에 반해 대침묵 피정은 용맹정진의 각오가 있어야 한다. 이번 나의 피정 신청은 경건한 시공 안에서 진득하니 묵상기도를 바치기 위해서였다.

나는 재속 가르멜수도원 회원 규칙에 따라 정해진 의무 기도를 매일 바치고 있다. 살짝 공개하자면 이렇다. 아침 성무일도와 그날의 복음 말씀 읽기, 정오 무렵의 묵주기도와 저녁 성무일도와 끝 기도. 뿐이랴. 30분 이상 묵상기도를 드려야 한다. 게다가 그날의 실천 여부를 기도점검표에 표시해야 한다. 이는 하느님과의 약속이니 점검표에 거짓으로 동그라미를 칠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매일 기도를 바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분주한 세상일이 일시에 몰려올 때면 기도가 버겁다. 그럴 때면 마지못해 건성으로 기도하게 된다. 특히 묵상 중에 혼침(昏沈)이 밀려오면 지구의 자전이 멈췄나 싶을 정도로 지루하다. 반면에 성령의 ‘feel~’이 꽂힐 때면 기도 시간이 후다닥 지나가는 은혜로운 때도 있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영적 세계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탓에 다양한 명상과 기도의 세계를 체험하고자 했다. 가령 수식관을 비롯한 위파사나와 염불선 그리고 기독교의 향심기도, 예수 호칭 기도, 묵주기도 등. 심지어 국선도와 기(氣) 수련도 살짝 경험했으니. 영적 오지랖이 넓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처럼 도판을 전전하는 모습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니면 에고의 장난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나의 영적 방황은 이해보다는 믿음 중심의 기독교 교리 탓도 있었다. 가령 구약성경은 <코헬서>, <욥기>, <요나>와 같은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도통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뿐이었다. 이런 갈등을 하고 있을 무렵, 두 가지 의미 있는 만남이 있었다. 그것은 데레사 성녀의 ‘아무것도 너를’ 기도문에 감동하여 재속 가르멜 수도원을 두드린 것과 어느 무명 신비가의 『무지의 구름』을 읽은 것이었다. 이 책은 묵상과 관상기도에 대한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무지의 구름』은 정확한 작가도 창작시기도 알 수 없다. 그저 13세기쯤 영성과 신학에 밝은 영국의 동미도란즈 시골 사제가 저술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저자가 제자에게 보내는 글 형식이며, 중세 기독교 신비 사상을 잘 담고 있다. 이 책이 유럽에 널리 퍼진 것은 15세기라고 한다.


『무지의 구름』이 세상에 알려질 무렵, 이탈리아의 보나벤뚜라와 카타리나, 독일의 에크하르트와 힐데가르트, 스페인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과 같은 뛰어난 신비주의자들이 등장한다. 이들 영성가들의 출현과『무지의 구름』의 상관성은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무지의 구름』 앞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자는 이 책을 읽지 말아야 한다”는 부분이 있다. 해당되는 이들은 ‘육적인 자, 자신을 공공연히 찬양하는 자, 소문을 퍼뜨리는 자, 남의 흠을 들추는 자, 호기심으로 시비를 가리는 자, 활동 생활을 하는 선량한 자’ 등이다. 이 같은 금독(禁讀)의 대상에 ‘활동 생활을 하는 선량한 자’도 해당된다는 것이 좀 의아스럽다. 아마도 활동적 신앙생활과 관상 기도는 어울리지 않아서일까.

대체『무지의 구름』은 어떤 뜻일까? 저자는 무지의 구름에 대하여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없이, 이 구름은 언제나 당신과 하느님 사이에서 당신이 지성의 빛에 의지해 이성적으로 그분을 보려 하는 것을 방해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랑의 행위로써 무지의 구름을 뚫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튜브에서 이름난 어느 영성가는 ‘무지의 구름’이란 일종의 '몰라' 상태로써, 자신의 모든 생각과 감각을 무지 속에 빠뜨려야 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무지란 일종의 ‘놓아버림’, 선불교에서 말하는 방하착(放下著)라고 풀이했다. 글쎄 그의 설명이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공부가 더 필요하다.

『무지의 구름 』에서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신성한 짧은 단어를 반복하여 무지의 구름 위에 있는 하느님을 향해 쏘라’는 부분이었다. 즉 짧고 거룩한 단어를 반복하면서 하느님을 바라보라는 말이다. 나는 떼제기도나 향심기도가 떠올랐다.

비록『무지의 구름』은 두툼한 분량은 아니지만, 기도에 관심 없는 이들은 읽기 어려울뿐더러 인연도 닿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영적 수준이 낮은 탓에 읽기가 쉽지 않았다. 훗날 하느님의 은총으로 기도 생활이 깊어진다면 이해되어 지기를 희망할 뿐이다. 영적 수행은 체험하는 것이지 ‘따따부따’ 말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글라렛수도원 개인 피정 때 『무지의 구름』을 다시 읽어볼 예정이다. 주님과 합일되는 은총의 카이로스가 언제 내려질지는 모르겠으나, 그날을 소망한다. 여기서 기도에 대한 한 가지를 새겨본다. 기도에도 중용이 필요하다. 방언과 같은 유별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느님의 은총의 내려지는 순간까지 묵묵히 인내하면서 그분을 바라볼 것이다.


『무지의 구름』은 하느님이 지천명 고갯길에서 내게 주신 영적 성물이다. 부디 세상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그분을 향하여 무지의 구름을 헤쳐보고 싶다. 새삼 '조급하지도 게으르지도 말라'던 카프카의 말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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