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냐(空)에 대한 메뉴얼

<반야심경> 오쇼 라즈니쉬

by 박신호

명상에 들어서면 라즈니쉬를 만나게 된다. 훗날 실망하면서 떠날지라도 그를 피하기란 쉽지 않다.브하그완 슈리’에서 ‘오쇼’로 이름을 바꾼 라즈니쉬는 수행자들에게 빛과 어둠과 같은 존재다.


전투경찰의 닭장과 최루탄이 일상이었던 1980년대, 명상은 불온한 한량이요, 불순한 마취제였다. 그것은 낡은 유리창에 적혀있는 ‘사주, 작명, 궁합’이라는 글씨만큼이나 철 지난 마약쯤으로 취급받았다.


정말 느닷없었다. 그 무렵 서점가에서 돌풍을 일으킨 김정빈의 <단(丹)>과 바바 하리다스의 <성자가 된 청소부>의 반란이었다. 사회과학 서적의 숲 사이로 ‘명상’을 내건 이 책은 뉴에이지의 전령이었다. 뒤이어 ‘정신세계사’와 ‘류시화’란 이름이 등장했고 인도의 성자들이 소개되었다. 그 중심에 ‘오쇼 라즈니쉬’라 불리는 ‘B.S. 라즈니쉬’가 있었다.


이 무렵 나는 명상에 쓸렸고 성직자가 되고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직에 대한 꿈은 우여곡절 속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명상에 대한 갈증은 여전했고 사막에서 물을 찾는 심정으로 헤매다가 불교 조우하게 되었다.


영광에서 하던 가스업을 거두고 어느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서른 쯤이었다. 습도가 미치도록 높았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옆자리에 있던 김 선생이 내게 라즈니쉬의 <반야심경-텅 빈 충만의 세계>라는 책을 추천했다. 마침내 라즈니쉬를 만나는 시절이 되었던 모양이다.


당시 라즈니쉬에 대한 풍문은 해괴했다. 가령 명상 수련이라며 집단섹스를 허락했고, 손가락마다 보석 반지를 끼고 있는 라즈니쉬는 영락없는 사이비 교주였다. 게다가 서점에서 인기몰이를 하던 라즈니쉬의 <배꼽>을 읽어 보았는데 헛웃음만 나왔다.

하지만 라즈니쉬의 <반야심경>을 추천해 준 김 선생의 남다른 안목을 믿었기에 책을 구입했다. 붉은색 표지바탕이 인상적이었는데 번역은 석지현이었다. 나는 <반야심경>을 몰입해서 거듭 읽었고 결국에는 천주교를 떠나서 불교로 전학을 갔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수냐(空)’이다. ‘수냐’는 산스크리트어로서 한자권에서 ‘공’으로 번역한다. 법정 스님은 수냐 즉 공을 가리켜 ‘텅 빈 충만’이라고 말했다. 수냐(空)는 비물질이면서 모든 물질의 중심이다. 이러한 이해불가의 실상을 반야심경에서는 '공즉색(空卽色)'로 풀이하고 있다.


수냐의 개념이 이해되자 희열감을 느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랄까. 특히 ‘공(空)이 색(色)이요, 색(色)이 바로 공(空)이다.’란 설명은 천지개벽이었다. 비물질과 물질은 하나라는 사실과 기도가 물질계에서 작용하는 원리를 찾아 낸 기분이었다. 마치 바오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던 에서 비늘이 떨어졌던 것처럼 말이다.

<반야심경>은 절대부정의 세계를 노래한다. 실체라는 것이 예당초 없다는 것이다. 중생은 그림자인 현실을 실상으로 착각하고선 희로애락에 빠져든다고 설명한다. 더 나아가 실체는 물론이요. 감각도 원래 존재하지 않다고 말한다. <반야심경>이 전하는 실상은 오늘날 신과학이 증명해내고 있다.


반야(般若)는 생각 없는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반야란 의도 없이 자신을 ‘수냐(공)’에 전적으로 맡겨둔 채 자유롭게 살아가는 경지를 말한다. 보살이란 이러한 반야의 세계에서 머무는 존재를 말한다.

한편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절대부정을 허무주의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허무주의란 에고의 투정에 불과할 뿐, 절대부정의 세계와는 멀다. 절대부정은 역으로 절대긍정의 세계와도 통하기도 한다. 이른바 죽음마저 초월하는 자리에 모든 것을 던질 때 생명이 시작 돠는 원리이다.


열반(니르바나)은 절대부정과 절대긍정의 틈에서 완성된다. 싯달타는 생사를 걸고 극한의 고행을 했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지친 그는 수자타에게 얻은 공양으로 겨우 몸을 추스른다. 이를 보게 된 싯달타의 벗들은 그가 바른 수행에서 멀어졌다고 비난하면서 떠나갔다.


홀로 남은 싯달타는 보리수나무 밑에 좌정한다. 눈을 감았고 ‘깨닫지 못하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라는 다짐 속에서 깊은 반야 의식으로 잠겼다. 그리고 마침내 샛별이 빛나는 새벽. 싯달타는 열반에 도달한다. 사바세계에 ‘붓다’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싯달타 즉 석가모니 부처는 절대부정과 긍정 사이에서 각성을 이룬다. 그 지점을 가르켜 중도라 일컬는다.


<반야심경>은 대승경전의 꽃으로 불린다. 관세음보살께서 깊은 선정에서 깨달은 실상을 부처가 사리불에게 전하는 내용이다. 비록 260자도 안 되는 경전이지만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으로 불린다. 현재 사찰에서 독송되는 <반야심경>은 현장본(玄裝本)이다.

관세음보살이란 호칭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보는(觀) 분이란 뜻이다. 소리를 보는 세상은 과연 어떤 경지일까? 궁금하다. 슬프게도 이번 생에는 볼 수 있는 경지가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라즈니쉬는 <반야심경>에서 “그대 안에 있는 붓다에게 깊이 절한다.”라고 했다. 작가 류시화와 무용가 홍신자의 스승이었던 오쇼 라즈니쉬. 인도에 가게 된다면 뿌나에 있는 라즈니쉬 아쉬람을 방문하고 싶다.


그곳에서 종일 두리번거리며 거닐다가 붓다홀에서 한동안 좌정할 것이다. 시 알겠는가?그의 영혼이 내게 다가와 '수냐에 주저말고 들어가라'며 조용히 속삭일지도... 모를 일이다. 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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