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지켜낸 성자
『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4교시 수업 시간이었다. 교실에 들어서자, 학생들이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했다. 봄기운이 한창인 4월 말이데 말이다. 하긴, 그날 따라서 햇살이 초여름처럼 강렬하기는 했다. 하지만 밖의 열기와 달리 실내 습도는 봄답게 쾌적했다. 이런 날씨에 에어컨이라니? 에어컨을 틀어야 할 만큼 더운 날씨가 아니라고 하자, 녀석들 표정들이 뾰족해졌다. 제 아무리 불만스러운 표정을 해도 아닌 것은 아니다.
“온난화의 심각성은 잘 알고 있지? 그런데 이 정도 날씨에 에어컨을 틀자는 거야?”,
“......”
“이상기온은 싫고, 에너지는 맘껏 쓰고 싶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
이쯤 되자, 아이들이 명분 없음을 눈치챘다. 어릴 때부터 풍요 속에 젖어온 아이들이다. 목소리는 높지만, 정작 실천은 버거워하는 세대이다. 생각하는 힘이 막연하니, 실천하는 힘도 막연하다. 실천 없는 구호와 각오는 위선에 불과할 따름이다.
환경 관련 지문을 읽을 때면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책이 있다.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 줄거리도 간략하고, 부피도 얇지만, 참된 삶을 알려주는 울림이 큰 책이다. 마치 마음에 쌓인 먼지를 빨아들이는 강력한 청소기와도 같다.
『고요함의 지혜』은 '엘리아르 부피에’라는 실제인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장 지오노는 그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그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나긴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한 잊을 수 없는 인격과 마주한 셈이다.”라고.(본문 11쪽)
황무지를 푸른 숲으로 가꾼 주인공 엘리아르 부피에게는 커다란 아픔이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유일한 혈육인 아들을 잃었던 것이다. 홀로 된 그는 숲으로 들어갔다. 요즘 말하는 ‘자연인’이 된 셈이다. 그곳에서 그는 양 몇 마리와 더불어 숲 속에 버려진 집을 고쳐 살았다.
그의 숲에서의 하루는 단순했다. 매일같이 황무지에 나무 씨앗을 심는 것이었다. 밤에는 씨앗을 골랐고, 낮이면 쇠막대기를 들고 종일 나무를 심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이 벌어진 동안에도 그저 묵묵하게 나무만 심을 뿐이었다. 그에게 풍기는 것은 고요와 청결 그리고 평화로움이었으며, 낙담과 회의는 볼 수 없었다. 그러면서 떡갈나무, 단풍나무, 너도밤나무 등을 평생토록 심었다. 때로는 심었던 나무들이 떼로 죽어버린 일도 있지만 이 또한 담담할 뿐이었다.
장 지오노는 엘리아르 부피에를 만나면 정갈하고 소박한 음식을 나눌 뿐, 몇 시간이 곤 말없이 경치만 바라보다가 헤어졌다고 했다. 그렇게 작가는 그와의 만남을 이어갔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1945년 6월이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87세였다고 했다.
엘리아르 부피에의 숨겨진 노고로 황무지 프로방스에 나무가 무성해졌다. 이유를 모른 사람들은 숲이 저절로 자랐다면서 놀라워했다. 산과 대지가 푸르러지자 주민들이 돌아왔고, 생기 넘치는 마을이 탄생했다. 한 인간의 실천이 만들어낸 에덴동산이었다.
여기 또 하나의 기적이 있다. 중국 내몽고 사막지대에 사는 바이완상과 이위찐 부부 이야기다. 척박한 사막 마을에 시집온 신부 이위찐은 삭막한 환경에 기가 막혔다. 비참함에 눈물만 흘리던 순한 소 같은 이위찐에게 어떤 소리가 들렸다. “그래, 나무를 심어야겠다. 모래 바람에 굴복할 수는 없지”라는 내면의 음성이었다.
그녀는 신랑 바이완상과 단 10% 생존하는 나무 심기에 도전했다. 이들 부부가 30년 동안 사막에 심은 옥수수, 수박넝쿨, 미루나무, 버드나무 등이 600만 평 사막을 초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들 은 사막인 토양에 1미터 간격으로 나무를 심고 일일이 물을 뿌려주었다고 했다.
그 결과 엘리아르 부피에가 가꿔낸 플로방스처럼 그곳에도 80 가구가 모인 번듯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중국 정부는 2001년 바이완상, 이위찐 부부에게 노동영웅이란 칭호를 수여했다. 우공이산의 후손인 그들은 동방의 엘리아르 부피에였다.
빙하는 녹아내리는, 불길한 고온이 일상인 된 세상이다. 덥다며 엘리베이터와 에어컨을 찾는 학생들만을 탓할 일은 아니다. 어쩌면 아이들도 욕망에 피해자일 수 있다. 녀석들에게 이번 여름 수업 시간에는 바이완상과 이위찐 부부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
이쯤 되자, 나 자신에게도 물어본다. 너는 지구 환경을 위하여 어떠한 실천을 했는가? 오늘 사용했던 종이컵은 몇 개였는지? 할 말이 없다. 학생들에게 부끄러워진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이다.
오늘 아침, 딸한테서 텀블러를 주문했다는 문자가 왔다. 잘됐다. 새 텀블러를 무기 삼아 일회용 사용이라는 습관을 고쳐보겠다. 실천은 입이 아닌 손과 발로 하기 때문이다. 비록 땅에 나무 한 그루 심을 처지는 아니지만, 내 영혼의 대지에는 한 그루의 나무를 정성껏 심어야겠다. 엘리아르 부피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