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젊은이가 “저는 그 모든 것을 다 지키겠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되겠습니까?”하고 다시 묻자 예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하셨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풀이 죽어 떠나갔다.” - 「마태오 복음」 중에서
기독교 성경에 있는 제법 알려진 이야기이다. 풀이 죽어 떠난 청년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께 찾아와서 삶의 길을 묻었던 것으로 봐서는, 진리 탐구에 관심 있는 청년인 것 같다. 하지만 예수의 말씀대로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따랐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버리면 얻는다.’는 역설도 있지만, ‘버림’이 쉽지 않은 일임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버림’이란 삶의 재설정이며, ‘회개(悔改)’를 전제로 한다. 회개(悔改)는 단순한 반성이나 후회만을 뜻하지 않는다. 헬라어 원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라고 하는데, ‘한 차원 위에서 마음을 보고 돌이키다.’란 뜻을 지닌다. 즉 새로운 삶에 향한 자기 선언이라 하겠다. ‘버림’은 그 대상이 물질이든, 습관이던 상관없이 삶을 전환하겠다는 선언이다.
내게는 두 번 정도의 성공적인 ‘버림’이 있었다. 2003년 7월 1일. 이날은 숱한 금연의 노력이 결실을 맺던 날이다. 금연을 위하여 침도 맞았고, 금연 학교도 다녔지만 니코틴 중독에 잠식된 내 영혼은 헤어날 줄 몰랐다. 금연의 순간은 뜻밖에 다가왔는데, 한마음이 우주의 전부라는 어느 스님의 글을 읽고 난 다음 날부터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벌써 14년 전 일이다.
미래를 알고 싶다는 욕망은 니코틴 중독만큼 강했다. 주역의 뜻을 알고자 여러 도서와 강좌를 찾아다녔고, 타로카드를 배우기 위해서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다니기도 했다. 명리학 근처도 한동안 서성거렸다. 뉴에이지라는 시대 분위기 매료된 외도(外道)요, 이단(異端)의 해괴한 이 길을 강산이 한 번 바뀌는 세월 동안 걸었다. 하지만 하늘의 뜻을 알아보겠다는 헛된 욕망도 내려놓았다. 내 에고가 고개를 떨군 ‘회심(回心)’이요, ‘회개(悔改)’였다.
이제 또다시 버릴 것을 헤아려본다. 스마트 폰이 일상 깊게 스며들면서 유튜브를 자주 접한다. 문제는 아침 기상 후, 첫 일과가 유튜브 감상이라는 것이다. 잠에 덜 깬 상태로 소파에 누워 십여 분가량 멍하게 영상을 보는 무의미한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잘 자고 일어난 첫 행위치고는 격 없는 짓이다. 겨우 영상을 뿌리치고 잠깐 무릎 꿇고 아침기도를 드리긴 하지만 의미 없는 짓으로 하루를 시작한 마음이 맑을 수 있겠는가?
철학자 최준석은 말한다 ‘시(視)’는 목적을 가지고 보는 것이고, ‘견(見)’은 그냥 대상이 오는 대로 보는 행위라고. 새 아침 유튜브 감상은 ‘견(見)’이며 중독에 가깝다. 그동안 식사할 때나, 길거리에서 스마트 폰에 빠진 이들을 보면 혀를 차곤 했다. 하지만 아침마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무의미한 영상을 견(見)하는 내 모습도 이에 못지않게 딱하다. 마땅히 ‘회개’와 ‘회심’이 필요하다.
버릴 것은 또 있다. 이번엔 다소 비겁한 것이다. 인터넷 기사를 검색해보면 ‘욱’하니 올라오는 내용들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행동하는 양심’을 임종하기 전까지 자주 말했다. 그때부터 생긴 나의 소심한 행동이 댓글을 통한 비판이었다. 특히 4대강 개발 기사마다 비난의 댓글을 남기곤 했다. 그 후로 댓글을 쓰는 습관을 멈추고자 ‘하지 않겠노라’ 다짐을 여러 번 했건만, 지금도 간혹 익명의 지붕 하에 저열한 비난의 댓글을 쓰곤 한다. 세상에 염치없고 부질없는 짓인데 말이다.
작년부터는 이 습관을 버리고자 페이스북도 절연했다.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올 초 계획 속에는 댓글과의 결별도 있었다. 하지만 한 달도 채 못 되어 대통령 선거에 불복하는 트럼프를 향하여 꽤나 넉넉한 댓글을 쓰고 말았다. 우리나라도 아닌 미국 대통령의 추한 행동을 보고는 배설에 가까운 댓글을 한바탕 써버린 것이다. 며칠 후, 그 댓글은 삭제했지만, 트럼프 같은 인간 때문에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점이 몹시 부끄럽다. 댓글 쓰기는 영혼을 탁하게 하는 허망한 짓이다. 이 또한 ‘회개’와 ‘회심’을 해야 한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라는 작품에서 애착의 고통과 버림의 해방에 대하여 말한다. 언제가 스님께서 아꼈던 책들과 음반을 주위 분들에게 나누어 준 글을 읽고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내게도 책과 음반이 제법 있는데, 스님처럼 타인들에게 애장품들을 준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심각한 내적 갈등에 빠져든다. 정말 한 차원 위의 마음이 아니고는 어려운 일이다. ‘버림’은 신께서 주시는 용기이자, 결단의 은총이라고 생각된다.
신문을 보니 얼마 전에 영면한 장진석 추기경의 유품으로는 낡은 성경이 전부였다는 기사가 있었다. 생전에 추기경께서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는 뜻이 담긴 ‘옴니부스 옴니아(omnibus omina)’를 사제생활의 지침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분의 소소한 일상의 모습까지는 알 수는 없지만, 스스로 정한 첫 마음을 잘 지켜 오신 분 같았다.
‘어떻게 사는가?’라는 질문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물질을 버리고 어찌 견딜 수 있겠냐?” 라는 속세의 화두에만 머문다면 버림의 은총은 멀기만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공중의 새와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잘 살펴보라’ 하셨다.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다시 한번 ‘옴니부스 옴니아(omnibus omina)’에 담긴 의미를 헤아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