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원 산내면 그곳에는 지리산 반야봉을 바라보고 있는 천년고찰 실상사가 있다. 이 절은‘실상(實相)’이란 사찰명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몇 해 전, 나는 이곳에서 대안 학교 학생들 몇 명과 함께 보름 동안의 농사 체험을 했다.
절집은 조석으로 예불을 드린다. 절에 잠시 머무는 객들이라면 예불 참석은 도리이다. 실상사는 새벽예불 시간에는 스님들 위주로 참석하고, 일반 대중을 위한 아침 예불은 별도의 시간에 마련되어 있다. 따라서 일반 대중들은 새벽이 아닌 아침 8시에 여유로운 예불을 드릴 수 있다. 스님들의 포용력이 관세음보살처럼 자비롭다.
예불 순서는 다른 절들과 다르지 않지만, 예불이 끝날쯤 ‘생명 평화의 경’이라는 이곳만의 특별한 기도문을 바친다. ‘생명 평화의 경’이라는 기도문은 실상사가 생명 평화 결사의 중심 도량이며, 인드라망 공동체라는 농촌 살리기 운동의 상징임을 보여준다. 그 기도문은 구구절절 아름다운 진리의 실상을 담고 있다. 아침마다 예불에 참석했던 나 또한 ‘생명 평화의 경’을 함께 바쳤다.
#2
실상사에서의 농사 체험이 끝나는 바로 전날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예불 시간 ‘생명 평화의 경’을 낭송하고 있었는데 읽었는데, 문득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저것이 있다.’라는 기도문 구절이 마음에 대못처럼 걸렸다. 불교는 연기법이 기본으로 하기에, 이 구절을 모르는 것도 아니였는데, 불현듯 이 날따라 의문이 들었다.
“원인에 따른 과보”라는 명제가 틀린 것은 아니건만, 세상의 모든 고통을 이렇게만 해석하는 것이 맞나 싶었다. 우리의 선한 이웃들 가운데는 이유 없는 고통으로 시달리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고통을 ‘인과에 따른 법칙’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마치 심장 없는 기계의 논리처럼 들렸다.
가령 '세월호에 승선한 학생들의 죽음도 인과에 따른 과보란 말인가?’, 슬퍼하는 유가족한테 ‘원인이 있어 그러한 것이니 슬픔을 달래라’고 말한다면, 도리에 맞는 것일까? 이러한 의심이 화두처럼 내게 들어왔다.
우리는 삶의 무게만큼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뜻밖의 재난과 억울함, 경제적 곤경, 육체의 질병 등을 피할 도리는 없다. 심지어 고통에 따른 깊은 내상은 시간이 지나도 몸에 각인되어 ‘트라우마’로 남는다. 우리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내게도 트라우마가 있다. 기억을 꺼내기도 싫을 정도다. 억울하고, 할 말은 많지만, 그 상황 자체의 불쾌함 때문에 기억을 애써 회피한다.
고통이 ‘원인에 의한 과보’라는 설명은 차가운 모범생의 말처럼 들렸다. 고해(苦海) 속에 허덕이는 중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논리적인 명료함보다는 따스한 위로가 아닐까? 문수보살의 지혜보다는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우리의 삶에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실상사에서 농사 체험을 마치고 귀가한 후에도 ‘고통의 이유’에 대한 이러한 질문은 계속되었다.
#3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유튜브 영상에서 의문에 대한 해결의 단서를 보았다. 영상에는 정규직으로 채용된 날, 사고로 인하여 전신이 마비된 어느 청년의 고통과 재활, 되찾은 행복을 소개하고 있었다. 청년은 비록 육신은 감각 없지만, 그는 환한 얼굴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용기는 경이로웠는데 한편 고마웠다. 마치 그 청년이 내게 “고통은 신께서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은총일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천주교 교리를 따르지만, 불법(佛法)에도 관심이 많다. 그러다 보니 두 종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하느님 사랑과 부처님 자비가 어찌 다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고통의 원인에 대한 해석은 서로 달랐다. 기독교는 ‘고통이란 하느님의 또 다른 은총’으로 해석한다면. 불교는 연기설에 근거한 인과법으로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고통의 근본에 대한 시시비비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싶다. 다만 각자의 처지와 인연에 따라서 말씀이 자신에게 와닿을 뿐이다. 다만 나는 ‘고통이란 진리에 다가설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허락한 또 다른 은총’이란 해석이 더 끌린다는 것이다. 어쩌면 고통이란 영혼의 정화(淨化)를 위한 통과의례는 아닌가 싶다.고통의 원인이 업보에 있든, 원죄에 있든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를 고해로부터 아픔 없는 곳으로 인도해 줄 자비가 필요하다.
마침 지금은 사순시기이다. 죽음을 이겨낸 신성한 인간을 기리는 날이다. 빗속에 매화가 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매화 꽃망울도 차츰 울긋불긋해진다. 추위 속에 피어난 매화는 사군자라 불리운다. 우리도 매화처럼 살아가고 견딜일이다. 피어난 매화를 바라보면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기도문을 나지막이 읊어 본다.
#4
“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