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동안 벽에 걸렸던 성지(聖枝)를 성당에 제출했다. 어느새 사순절이 다가오고 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들에게 사순의 사십일은 각별하다. 카니발의 시간이 지나면, 이마에 재를 바르고 금욕과 수난의 시간으로 들어갈 것이다. 성지(聖枝)는 예수께서 스스로 수난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군중이 흔들었다는 종려나무 가지를 상징한다. 그때 군중들은 “호산나”라고 외쳤단다. 성지는 곧 불에 타서재가 될 것이다. 재는 소멸이자 밑거름이다.
전동성당은 아름답다. 나와 어머니는 그곳 뜰에 있는 ‘피에타’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들의 죽음을 안은 어머니의 비통함이 돌에 스며있다. “원래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며, 복제 조각상으로서...’라며 안내원처럼 어머니께 설명한다. 두 손을 모으고 ‘피에타’를 보시던 어머니께서는“오메~”탄식을 한다.
마리아의 고통을 기리는 종교음악이 있다. 슬픔에 잠긴 성모님을 뜻하는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가 그것이다. 성서에서 전하기를, 예언자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날카로운 칼이 그대 영혼을 아프게 찌를 것이오” 라고. 생살이 떨어지는 듯한 마리아의 아픔을 ‘스타바트 마테르’는 선율로 전한다. 나는 페르골리지의 ‘스타바트 마테르’를 들을 때면 눈이 감긴다.
#2
직장 상사가 내게 말했다. “천주교인들은 점잖은 것 같은데... 마리아를 믿는 것은 좀...거시기 하데”라고.‘거시기’란 말 속에습한 냄새가 풍긴다. 세상은 ‘거시기’를 이유로 가톨릭을 ‘마리아교’라 폄훼한다. 목소리 높은 자가 외치는 ‘거시기’ 는 거친 일방통행이다. 숱한 종교의 증오와 살상은 ‘거시기’에서 비롯했다.
노자께서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이라 했던가?“마리아를 신으로 섬기냐?”는말을 향하여 구절구절 대답할 이유는 없다. 신학자도 아닌 내가 다툴 영역이 아니다. 이런 분별은 에고의 장난이다. 눈 맑은 이들은 속지 않는다. 그저 나에게 마리아는 믿음의 모범, 모정의 상징이다. 그녀는 마돈나, 성스러운 어머니시다.
‘기적’은 양날의 칼이다. 신비와 유혹의 갈림길에 자리한다. 기적은 믿음의 세계에서 왕왕 일어나는 초현상이다. 성모마리아 발현은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 현상이다. 성모마리아 발현 기적은 이단 논쟁부터 비티칸의 공식 공인까지 다양하다. 나는 과달루페 성모님과 파티마 성모님 그리고 이집트 자이툰 성모님 발현을 묵상하곤 한다. 내 기도 책상 위에는 과달루페 성모님이 놓여있다. 나의 마돈나이시다.
#3
어느 날, 18세 소녀 앞에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는 그 소녀에게 곧 잉태할 임을 예고한다. 처녀의 임신. 그것도 약혼자가 있는. 게다가 그곳은 율법의 사회가 아니던가. 천사의 예언이 실현되는 날은 소녀의 제삿날이다. 부정한 여인이라는 낙인은 죽음으로만 답해야 한다. 에집트 탈출 이래, '오직 율법'만을 외치는 그들이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감당할 수 없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이렇게 답한다. “저는 처녀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떨리고 무서웠을 것이다. 계속된 천사와의 대화 끝에서 마리아는 모든 생애를 걸고 답을 한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라고. 이제 마리아는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서버렸다.
어느 날 천사가 나에게어깨 빠지는 불행을 예고한다면 마리아처럼 오롯이 순종할 수 있을까? 틀림없이 ‘요나’처럼 도리질하면서 달아날 것이다. 물론 그래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겠지만. 그분이 펼쳐놓은 하늘 그물을 벗어날 방법은 없다. 그래서 문제이다. 벼랑에 서서 허공으로 발을 내딛는 믿음. 그것이 생사를 가르는 비밀의 문이라고 배웠다. 열쇠는 주님의 자비이다. 자비를 부지런히 청해야 한다.
#4
천사로부터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받은 마리아는 두려움을 달래 줄 위로가 필요했다. 그녀는 먼 친척인 엘리사벳을 찾아간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환대와 위로를 받는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아름다운‘마니피캇’을 노래한다. 매일 저녁 성무일도 기도 시간이면 만나는 ‘마니피캇’. 진리께 인간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전적으로 봉헌하는 찬미가이다.
유월절, 어린 아들 예수의 실종. 뒤늦게 알게 된 마리아와 요셉은 혼비백산이다. 예루살렘 골목길을 사흘간 뒤진 끝에 성전에 있는 아들 예수를 겨우 찾았다. “왜 나를 찾으셨나요?, 내가 하느님 집에 있어야 할 줄 모르시나요?”라는 어이없는 아들의 말. 젊은 엄마 마리아는 그때 멀어져야 하는 아들을 얼핏 보았을 것이다. 성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했다.’라고.
아들 예수가 죽어간다. 십자가에 매달린 아들을 곁에서 바라보는 마리아. 그녀는 아들과 함께 십자가의 고통을 나누고 있다. ‘스타바트 마테르’는 이 장면을 노래하는 음악이다. 한때 자신의 몸이었던 아들. 그러나 진리 자체인 아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관통하면서 마리아는 성모의 길을 걷는다. 홀로 남은 마리아에 대하여 사도행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여러 여인들과 예수의 형제들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마음을 모아 기도에만 힘썼다.”
#5
나는 전동성당 뒤뜰에 있는 피에타를 다시 바라본다. 팔순이 넘으신 어머니는 밤마다 안방에 있는 성모상 앞에 앉는다. 애잔한 자식들을 위하여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이다. 녹녹지 않은 삶의 여정을 걷는 여동생들과 희비의 고갯길을 넘나드는 나를 위한 기도를 지극히 올려 주신다. 며칠 전부터는 언어치료사로 사회 첫발을 내디딘 손녀를 위한 기도도 시작했단다. 자녀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얼굴에 성모마리아의 모습이 겹쳐진다.
어머니는 자박자박 느린 걸음으로 성당 정원에 놓인 돌의자에 앉으신다. “겨울인데도 오늘은 날이 좋구나. 저 성모님도 예쁘네”라며 빙그레 웃으신다. 바라보니 루르드 성모님이 정오의 햇살 아래 서있다. 나도 그 옆에 앉아서 주머니 안에 있던 묵주를 꺼내 본다. 따뜻한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