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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호 Dec 30. 2023

노인 전입 신고서

『초보 노인입니다』 김옥순. 민음사

 작은 수납함을 샀다. 근래 복용하고 있는 약들을 넣기 위함이었다. 작년만 해도 아내가 영양제를 권하면 그럴 필요 없다고 큰소리를 쳤다. 당시 아내는 코웃음을 치며 이제 나이를 생각해서 챙겨줄 때 먹으라고 타박했다. 한데 말이 씨가 되었을까? 금년 초, 종합영양제를 필두로 혈압약과 고지혈약을 처방받았고 덤으로 오메가 3까지 복용하게 이르렀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눈 밑이 쳐져 가고, 모발도 가늘어지는 등 몸의 변화가 확연하다. 노안으로 다초점 안경을 쓰게 된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 내게 일어나는 생로병사라는 생물적인 노화 진행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서일까? 간혹 공원이나 도서관에서 소일하고 있는 백발의 어르신들을 볼 때면 남 일 같지 않았다.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김옥순 작가의 초보 노인입니다라는 책을 추천받았다. 유혹적인 제목 때문이었는지, 대기하고 있던 책을 미루더라도 당장 읽고 싶을 만큼 조바심이 일었다. 알고 보니 브런치 대상에 빛나는 책이었다. 내용은 교직에서 퇴임한 작가가 경험한 실버 아파트 체험기이자 일종의 노인 전입 신고서였다.    

 

 서문에 나와 있는 난 아무런 준비도 생각도 없이 덜컥 실버 세계로 들어와 버렸다.”는 작가의 고백은 서늘했다. 그것은 너 또한 예외가 아니다라는 속삭임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작가는 요양원?이라고 묻는 지인들에게 요양원이 아니고 실버 아파트야.”라며 힘주어 말한다. 지인들은 '실버'란 단어에 작가는 '아파트'에 방점을 두는 까닭이다.   

  

 요양원은 보살핌을 뜻하는 말과 달리 두려운 곳이다. 왠지 인생의 결구(結句)’이자 삶의 코다와 같은 뉘앙스가 물씬 풍긴다. 흔히 요양원이라면 가족마저 간병을 포기한 늙음을 겨우 연명시키는 병동 정도로 인식한다. 달리 말하면 죽음의 대기 장소이며 육신의 옷을 벗는 탈의실 같은 생사의 갈림길이기도 하다.

    

 어쩌면 나 또한 늙으신 모친을 그곳으로 모실 수도 있을 것이고, 내 삶의 끝자락을 요양원에서 맞이할 수도 있을지 모를 일이다. 바라건대 그런 날이 온다면 먼저 가방을 들고 가족에게 손을 흔들면서 요양원을 찾아가련다.    

  

 환경은 삶에 품격을 부여하는 법이다. 백세를 맞이한 대주교가 머무는 시골 신학교의 별채나 고목 같은 노승이 상좌와 지낸다는 암자는 생의 마지막 뜨락으로 빛나는 곳이다. 그저 내면의 고독을 익혀서, 그 시절이 나를 찾으면 미련 없이 본향으로 떠나고 싶다.


 남자 목욕탕에 똥이 떠다녔대요. 괄약근 약하면 탕에 들어가지 말아야지.”(91). 책을 읽다가 멈칫했던 문장이다. 노년은 청춘들보다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이는 정신 승리일 뿐. 육신의 풍화가 늙음임을 부인할 수 없다. 젊은 날에는 밤을 하얗게 새워도 다음 날이면 성성한 몸과 정신으로 돌아다녔지만 요즘 같으면 수액주사를 맞게 될 것이다. 내 의지로 어디든 갈 수 있는 체력과 적절한 감각의 통제. 신께 청하는 노후 보험이다.

  

농협 가야지, 오늘 교통카드 신청하기로 했잖아”(175) 2025년이면 65세 노령인구가 950만 명. 초고령화 사회 진입 원년이라고 한다. 연금 납부자보다 수령자가 많은 세상. OECD 기준 노인 빈곤 1위라는 기사를 볼 때면 노후의 경제적 삶이 은근히 불안해진다. 여행을 즐기고, 문화생활을 누리고, 손주들에게 용돈도 주고, 각종 모임에서도 기죽지 않을 만큼의 여유를 바라지만 과연 가능할는지. 머잖아 초대받을 미래가 뿌옇다.

     

 초보 노인입니다를 읽으면서 노년의 품격을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도 위생의 중요성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노인 냄새라 불리는 후각 반응에 섬세한 유의가 필요했다. 귓속과 손톱의 청결 그리고 단아한 복장은 노후의 품격으로 가는 첫 단추였다. 평소 향수는커녕 로션도 멀리했는데, 그랬다가는 피붙이들마저 경원하는 노인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한번 향수라는 물건을 써볼까? 설마 아내가 의심하지는 않겠지. 

    

 멋진 노년은 행동과 말투에 달려있을 것이다. 자식 자랑, 건강 자랑, 돈 자랑을 삼가라는 말을 들었다. 간혹 경로당을 다니던 어르신들이 발을 끊어버린 경우도 노인들의 자랑 때문이란 말도 들었다. 그러니 연식에 못 미치는 마음 씀으로 주변의 벗들과 가족에게 고통을 주는 철없는 노인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그저 환한 미소를 빙그레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어른다운 어른이 되는 것. 내 노년의 화두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임종이 가까울 무렵, 어느 수녀가 죽음을 앞둔 심정을 물었단다. 추기경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죽음을 생각하면 수능을 며칠 앞둔 수험생처럼 떨린다고 했다. 정직한 고백이다. 노년의 삶이란 머잖아 건너야 할 스틱스강의 나루터이다. 잘 살아야 순한 죽음을 맞이하는 법, 인생이란 생사의 강을 건너기 위한 리트머스지 같은 것이다.      


누가 먼저 죽든 그렇게 하자고, 당신이 먼저 죽게 돼도 굶게 놔둘 거야. 손은 내가 잡아 줄게”(223)라는 작가의 말은 아름답다. 죽음이 슬픈 까닭은 정든 이들과 헤어지기 때문이요, 정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법. 보행이 어려워 다른 이동 수단에 의지할 때면 삶을 내려놓아야 할 때임을 눈치채야 한다.    

죽음이란 옷을 갈아입는 행위다. 영원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고 그리스도 의식에 도달하기 위한 영적 순례라는 말을 믿는다. 초보 노인입니다는 그런 날을 준비하라는 신의 윙크와 같은 책이었고, 품격 있는 노년을 위해서 부지런히 사랑을 배워야 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책을 덮으면서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일일호일시(日日好日是)를 마음에 새겨본다. 다가올 이순과 일흔, 팔순으로 이어진 생의 내리막길을 바라본다. 서서히 짐을 챙기고 나설 준비를 해야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쫄지말고 기꺼이 떠나보자. Let's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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