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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호 Oct 24. 2021

힘을 내요♪ 슈퍼파월, 마에스트로 k

                                                                   #1

마에스트로 k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가 상임지휘자로 있었던 오케스트라에서 터진 성희롱 사건으로 지휘봉을 내려놓은 지 오래되었다. 훗날 밝혀진 이 사건 전모는 기가 막혔다. k의 지독한 연습에 불만을 품은 일부 단원들이 꾸며낸 악의적인 조작으로 드러났다. 화려한 전송을 받으며 빛고을 떠났던 k의 부침(浮沈)은 씁쓸했다. 인격살인을 당한 그는 동해안 어느 어촌으로 사라져 버렸다.     


                                                                     #2

 온통 빙판이건만 눈이 쉬지 않고 종일 내렸던 추운 겨울 저녁. 나는 광주시향 263회 정기연주회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하여 빙판길을 이리저리 헤쳐가며 공연장으로 총총걸음을 했다. 연주회 시간은 늦은 8시. 밤하늘 별빛이 잠시 보일 듯하더니, 다시금 잿빛 허공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둠 속 시퍼런 칼바람은 내리는 눈을 포탄 쏘듯 멀리 날리고 있었다.     


 이날의 연주회는 빛고을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각별했다. 마에스트로 k의 고별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광주시향은 k의 부임 이후 제법 준수한 오케스트라의 면모를 뽐내기 시작했다. 관우를 만난 적토마라 할까. 광주시향은 공연마다 주목받는 레퍼토리와 연주력을 보여주었고 매진되는 횟수도 잦았다. 예향(藝鄕)은 클래식의 세례를 받았다.      


마이스트로 k. 그는 철학을 공부하던 중 베토벤에 빠졌고, 음악을 배우고자 독일로 유학 간 늦깎이 출신이다. 그는 아직까지도 베토벤 교향곡들을 감히 지휘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그를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와 동일시했다. 마에스트로 k는 어느 해 5.18 기념 공연으로 말러의 2번 교향곡부활을 지휘했다. 무려 한 시간 삼분에 걸치는 대곡을 지방 오케스트라가 도전한다는 그 자체가 놀라웠고  의미에 숙연했다. 땀을 흘리며 묵직하고 웅장하게 부활을 지휘하던 k의 모습에 5월 빛고을은 감동했다.  

    

                                                                     #3

  우리의 ‘강마에’ k가 광주시향을 떠난다는 풍문이 슬금슬금 떠돌더니 결국 263회 정기연주회가 마지막 공연이란다. k를 보낸다는 아쉬움으로 공연장은 궂은 날씨 속에서도 후끈거렸다. 오죽하면 시작이 10분이나 연기되었을까. 끝내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복도에서라도 연주회를 듣겠다고 떼를 쓰고 있었다.  

    

  드디어 마에스트로 k의 마지막 공연이 요한 스트라우스의 박쥐 서곡 함께 시작되었다. 방송국 카메라 앵글도 이곳저곳을 비추고 있었다. 지휘봉을 쥔 그의 손이 음악을 열기 시작했다. 첫 곡의 연주 후, 로비에서 입장을 요구하던 지각생들도 박수 소리에 실려 살금살금 객석 통로로 들어와 앉았다.     


  두 번째 연주곡은 엘가의 '첼로협주곡'이었다. 다소 산만하던 장내도 한층 차분해졌다. 숨죽인 객석도 k의 지휘 동작에 따라 하나의 선율로 서서히 어우러졌다. 시향 단원들도 혹독한 연습으로 소문났던 K와의 각별함을 숨길 수 없다는 듯, 지극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현악기 선율의 너울거림도, 부드러운 관악기의 넘김도, 금속 악기의 탄탄함도, 타악기의 강렬함도 그의 지휘 아래 이루어지고 있었다.   

 

                                                                #4

 2부가 시작되오니 장내로 들어와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가 청중들을 다그쳤다. 2부는 ‘드보르작의 신세계로부터. K의 신세계는 어딜까? 이곳 빛고을일까? 후임지인 경기도일까? 나는 빛고을이 그에게 신세계였기를 바랬다. 1악장과 2악장이 지났고, 이제 그의 지휘는 절정을 향하고 있었다. k는 땀에 젖은 긴 뒷머리를 넘기며 온몸으로 소리를 빚고 있었다. 청중들도 그와 함께 신세계로 들어갔다. 4악장마저 끝났다. 잠시 숨 고르는 진공 같은 정적이 흘렸다. 객석을 돌아보며 k는 깊게 머리를 숙였다. 객석은 끝없는 기립박수로 그에게 고마움과 아쉬움을 전하고 있었다.     


  마에스트로 K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객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퇴장했지만 환호는 멈추지 않았다. 다시금 무대로 나온 k가 지휘봉을 쥐었다. 앵콜은 포레의 '파반느. 서럽고 아름다운 선율이 객석을 채우고 있었다. 그때였다. 지휘하던 K가 퇴장해버렸다. 지휘자 없는 연주만이 멈춤 없이 계속되었다. 객석도 출렁거렸다.      


  음악회가 끝났다. 얼음과 눈으로 무섭게 반짝이는 밤길을 걸었다. ‘k 연주 도중에 나가버렸을까, 뜨거운 반응에 감격해서?.. 아니면 이별이 아쉬워서?’ 추운 밤길 속에서 서서히 마음이 뜨거워졌다. 순간, 연주 도중에 자리를 떠난 k의 마음이 전해졌다. , 자신이 받았던 빛고을의 사랑을 시향 단원에게 회향(回向)했구나. 아름다운 연주를 당부하는 그의 기도였구나.’ 집에 들어와, 뜨거운 차(茶)에 몸을 녹이면서 포레의 파반느를 들어보았다. 그날 이후 이 곡은 내게 영원한 이별의 노래가 되었다.     


                                                                         #5

  마에스트로 k는 빛고을 떠났다. 후임지에서 그가 겪은 참담한 사건의 트라우마를 잘 이겨내길 바란다. 관행(慣行)을 이유로 인격살인을 당한 우리의 강마에 k가 영원히 지휘봉을 놓을까 염려되었다. 다행히도 최근에 그는 차이코프스키 만프레드 교향곡을 대전 시향과, 랑고르의 벼랑의 목가를 코리아 심포니와 초연했다고 한다.      


 깊어진 두 눈으로 우리 곁에 돌아온 마에스트로 k. 그가 마음껏 자신의 음악을 펼치기를 소망한다. 순례하는 지휘자 k의 연주에 내 영혼을 정화 시켜야겠다. 늦은 저녁, 그가 그토록 연주하고 싶지만 주저된다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들으면서 주문을 외워 본다. “힘을 내요♪ 슈퍼파월 ~ 마에스트로 k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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