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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호 Dec 03. 2021

삼국지 열독기(熱讀記)

#1

  도서관에서 삼국지를 대출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삼국지가 아니라 삼국지연의이다. 진나라 사람 진수의 삼국지도 있는데, 사람들은 잘 모른다. 대부분 원나라 때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만을 알고 있다. 삼국지는 정사(正史)이며, 삼국지연의는 야사(野史)에 해당한다. ‘연의(演義)’란 역사적 사실에 흥미를 덧칠한 갖 재미가 들어있다.     


 삼국지는 중국 사대기서의 으뜸이며, ‘세 번 이상 읽은 이는 피하라는 말까지 있을 만큼 인생살이의 종합판이다. 인생의 지혜와 삶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삼국지를 읽은 것이 군 제대 무렵이었으니 삼십 년도 훨씬 더 지났다. 이번 가을에 삼국지를 다시 한번 읽기로 했.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 않던. 삼국지 읽기의 끝판이 될 것이었.     

 

#2

  지금껏 삼국지를 열 번쯤은 읽었.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거의 해마다 읽었다. 대학 시절까지 읽었던 횟수가 대략 그 정도는 되었다. 당시 우리 집에 있는 책이라곤 삼국지와 옥편뿐. 삼국지는 아버지가 소장한 유일한 책이었다. 내가 만난 첫 삼국지는 김광주 번역본이었다. 김광주는 인기 작가 김훈의 부친이다. 김광주의 삼국지는 크라운 판형에 , , 세 권짜리였다. 세로 행에 한자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붉고 두툼한 책에 자주 눈이 갔다. 그 책은 권당 무려 500쪽이 넘었다. 삼국지라는 금박 글씨가 고급스럽게 붉은 표지에 새겨져 있었다. 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그해 여름 방학 때 여름 성경학교를 다녔다.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었고 순전히 공책과 연필 그리고 과자를 얻기 위해서였다. 아무튼 여름 성경학교를 우수한 성적(내 기억으론 그렇다)으로 졸업했고, 학용품과 과자를 듬뿍 가져와 동생들을 들뜨게 했다. 성경학교는 끝났지만, 방학이 여러 날 남아있었다. 마땅히 할 일도 없이 적적했다. 그 탓이었을까. 집에 있는 그 붉은 책을 펼쳐보았다.      


 펼쳐보니 동양화풍의 삽화가 크게 그려져 있었다. 말을 탄 장군이 긴 수염을 멋지게 휘날리며 악당같이 생긴 장수의 목을 창으로 치는 장면이었다. ~ 전쟁 이야기~”란 생각에 흥미가 생겼고 겁 없이 곧장 읽기 시작했다. 초반 지루했던 부분을 지나고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하는 장면까지 도달하자 뭔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질 거란 예감이 강하게 왔다. 손님 옷을 세탁하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옆에 앉아서 읽었다. 비록 모기가 독서를 방해지만 굴하지 않았다.     


 저녁에 아버지께서 이해가 되느냐고 물었다. 삼국지를 읽고 있는 내 모습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사실은 세로 행이다 보니 가끔 옆줄로 빠져서 이해하는 데 혼란을 겪기도 했었다. 또 하나는 숫자가 한자로 적혀 있었는데,, , , 정도는 짐작되었지만 나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모르는 , , , , 를 적어주셨다. 나는 이 내용을 참조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났고 방학은 서서히 끝나갔.     



#3

 개학을 했지만 삼국지를 놓을 수가 없었다. 학교로 가져가기에는 너무 큰 책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 먹기 전까지 읽었다. 그런데 등굣길 만나는 친구들이 책 속에 나오는 병사들 같았고 선생님들은 장군들 같았다. 조조를 닮은 선생님, 장비 같은 옆 반 담임 선생님. 담임 선생님은 나이가 지긋했는데 유비의 스승 노식을 닮은 것 같았다. 집에 오면 가방을 던져 놓고 삼국지부터 읽었다. 제갈량이 등장할 무렵부터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추석이 다가올 무렵에는 조조가 적벽에서 무너졌고 천하는 삼분이 되었다. 마침내 착한 유비가 황제가 되었다. 마치 내가 황제라도 된 듯 뿌듯했다. 하지만 그해 추석은 우울했다. 관우가 죽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장비가 그리고 조조가 죽었다. 관우가 죽는 부분은 차마 읽을 수가 없어서 책을 덮어버렸다. 착한 주인공은 결코 죽지 않던데 속이 상했다. 제갈량도 오장원에서 피를 토하며 죽었고, 천하는 느닷없이 사마씨의 진나라로 통일되어버었다. 어느새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이 되어 있었다.    

  

  무려 1500쪽 분량의 크라운판 삼국지를 삼 개월에 걸쳐 읽었다. 부모님은 이 사실을 옆집 중화요리집 사장님부터 시작해서 동네 어른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나를 바라보는 동네 어른들의 눈빛이 그윽해졌다. 노식을 닮은 담임 선생님도 어떻게 알았는지 조회 시간에  이 사실을 독서 우수 사례로 알렸다. 그날부터 점심시간이면 주위 친구들에게 삼국지 이야기를 해줘야 했다. 문제는 친구들이 너무 재미있게 듣는다는 었다.      

#4

 그 후로도 매년 삼국지를 읽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초한지', '열국지'까지 섭렵했다. 고등학교 때는 밀려오는 공부 탓에 읽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대학시험을 마치고나서 다시 삼국지를 만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마지막 관문이었던'수호지' 함께 읽었다. 대학 진학은 고전문학을 공부할 수 있다는 담임의 말씀에 따라 국어국문학과로 결정했다. 군대에서 제대하고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문열의 삼국지를 읽었다. 그때부터는 황건적이 불쌍했고, 조조에게도 호감이 생겼으며, 관우, 장비보다는 조자룡이 한결 듬직했다.   

  

  삼십 년 만에 삼국지를 읽었다. 헤아려보니 열한 번째 만남이었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별다른 흥미와 감동을 느낄 수 없었다. 달리던 적토마도 멈췄고, 온갖 권모술수도 심드렁했다. 어린 시절 삼국지의 바다에서 헤엄치던 내가 없었다. 도원결의, 비육지탄, 삼고초려, 천하삼분지계, 칠종칠금, 눈물의 출사표, 제갈량의 죽음. 이 모두가 평면적일 뿐.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건성건성 읽고 말았다. 

   

  황석영의 삼국지 열권을 한 달 보름 만에 반납했다. 학창시절의 감동은 어디로 갔을까? 제갈량이 되고 싶었던 그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세월 탓일 거라며 씁쓸하게 답을 해본다. 책을 반납하고 나오려는데 신도서 코너에 있는 책 한 권이 유혹한다. <라틴어 수업>의 저자 한동일의 신간이다. 이 책, 대출합니다.”라고 말한다. 사서는 못 말리겠다는 듯 씩~하니 웃는다.  대출 받은 책을 가방에 넣고 나온다. 노란 은행잎이 지천에 떨어진다. 가을이 내리막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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