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푸르름에 잠깁니다. 꽃 잔치를 끝낸 숲은 초록의 한계치로 달려갑니다. 한낮의 열기를 품은 나뭇잎들이 투명한 빛살을 튕기고 있습니다. 이제 숲은 나무 그림자들로 짙어갑니다. 지금 나는 야트막한 산길을 걷는 중입니다. 어느새 이마에 흐르는 땀을 산들바람이 식혀 줍니다. 바람에 너울대는 잎사귀가 새들의 날갯짓 같습니다.
“… 그렇지만 당신의 앞에 펼쳐진 주님의 숲에 / 지친 당신이 찾아온다면 숲은 두 팔을 벌려 / 그렇게도 힘들어했던 당신의 지친 어깨가 / 이젠 쉬도록 편히 쉬도록 여기 주님의 숲에 / 당신이 느꼈던 지난날의 슬픔의 기억들을 / 생각하고 잊어버리고 또 생각하네…”
산길을 오르면서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생활 성가 <주님의 숲>이죠. 몇 해 전, 청년 미사 시간에 들었던 노랜데요, 가사를 음미하다가 울컥했습니다. 그 후로 다른 생활 성가곡까지 즐겨 듣게 되었지요. 가끔은 축일을 맞이하는 교우에게 파일로 내려받아서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의 숲>은 위로와 희망을 말합니다. 마음이 요란하거나 생각의 데시벨이 높아질 때면 들어보세요. 주님의 고요가 찾아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삶에 지친 누구든지 주님의 숲에 가면 그분이 두 팔로 우리를 안아 준다잖아요.
며칠 전 만났던 오랜 벗이 생각납니다. 투병 중인 그였습니다. 원체 심지가 굳은 친구지만 병치레에 고달팠을 것입니다. 약속한 장소에 들어서자 “요셉, 여기야” 환한 목소리로 손을 흔들더군요. 벗은 의연했습니다. 고단함은 묻어났지만 악수할 때 힘은 강했고 음성도 튼튼했습니다. 그동안, 발밑이 꺼진 듯한 고통 중에도 주님만을 바라보았다고 하더군요. 그와 정담을 나누면서 가족에 대한 고마움과 기도를 해준 선한 이웃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날 벗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였습니다. 그것은 고통을 희망으로 바꾸는 연금술,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마침 6월은 예수 성심 성월이지요. 눈을 감고서 주님의 자비하심을 묵상해 봅니다. 벗도 ‘주님의 숲’에서 완쾌될 것입니다. 나 몰라라 하실 예수님이 아니잖아요.
문득 복음 말씀이 떠오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오 11장 28~30」. 그분의 음성이 주님의 숲에서 들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