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아침 7시다. 기지개를 켜면서 거실로 나간다. 오늘은 딸의 결혼식이다. 옆 방에는 내 손을 이어 딸의 손을 책임질 새 신랑이 자고 있다. 처음 치르는 자녀 혼인인지라 신경이 많이 쓰였다. 내가 아닌 아내가 말이다. 몇 달 전부터 아내는 식장 예약, 예단과 예물, 이바지 등 여러 준비를 헤쳐왔다.
해가 둘이면 혼란스럽다. 결혼에 관한 모든 지휘는 아내의 몫이었다.가장으로서 무책임한 것이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한다. 이럴 땐 고분고분 아내의 작전대로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상수다.
눈감고 기도하는데 포정해우 일화가 떠오른다. 빵 한 쪽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한다.아내와 아들, 딸 그리고 새 식구가 될 사위가 일어난다. 거실이 분주해진다. 예식은 오후 3시부터이니 메이커룸에는 12시까지 가야 한다. 나는 슬그머니 서재로 들어간다. 요란한 발걸음을 들으면서『장자』의 <양생주>에 나오는 ‘포정해우’ 일화를 생각해 본다. 백정 포정처럼 하늘의 흐름으로 타기로 마음을 잡는다.
포정(庖丁)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서 소를 잡는데, 손으로 쇠뿔을 잡고, 어깨에 소를 기대게 하고, 발로 소를 밟고, 무릎을 세워 소를 누르면, 〈칼질하는 소리가 처음에는〉 획획 하고 울리며, 칼을 움직여 나가면 쐐쐐 소리가 나는데 모두 음률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 상림(桑林)의 무악(舞樂)에 부합되었으며, 경수(經首)의 박자에 꼭 맞았다.
문혜군이 말했다. “아!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포정이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道)인데, 이것은 기술에서 더 나아간 것입니다. 처음 제가 소를 해부하던 때에는 눈에 비치는 것이 온전한 소의 겉모습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뒤에는 온전한 소는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신(神)을 통해 소를 대하고,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의 지각 능력이 활동을 멈추었습니다. 대신 신묘한 작용이 움직이면 자연의 결을 따라 커다란 틈새를 치며, 커다란 공간에서 칼을 움직이되 본시 그러한 바를 따를 뿐인지라, 경락(經絡)과 긍경(肯綮)이 〈칼의 움직임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는데 하물며 큰 뼈가 무슨 장애가 되겠습니까!”
『장자』에서 만나는‘포정해우’ 일화는 큰 울림을 준다. 내 의지가 아닌 신령한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수승(秀昇)한 경지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어색한 메이컵과 하객 맞이, 딸의 손을 잡고서 신부 입장. 사진 촬영, 지인, 친지들과 인사, 예식비 정산까지. 아무쪼록 좋은 날이니 내 뜻이 아닌 하늘의 흐름에 이끌려 가기로 다짐한다.
소를 해체할 때 포정은 자연의 결을 따르라고 했다. 흔히 큰일이 닥치면 몸과 마음에 힘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힘써 관절뼈를 부수고 거칠게 힘줄을 끊는 격이다. 힘은 힘대로 들건만 되려 사단이 생길 수 있음을 경험했었다.
원주의 성자라 불리던 무위당 선생은 늘 ‘마지못해서 하라’고 했다. 몸과 마음의 힘을 빼라는 뜻이다. 자신의 에고가 녹여져 흐물흐물할 때만이 신령한 하늘의 기운이 내면에 임할 수 있음이다.
‘그래, 뜻 없이 닥치는 대로 자연스럽게 하는 거야.’ 이렇게 자신에게 일러준다. 새로 산 양복을 입는다. 넥타이를 메는 것도 오랜만이다. ‘어떻게 매더라’ 순서가 알쏭달쏭하다.‘애라, 모르겠다.’ 중얼댄다. 무의식의 힘을 믿고서 넥타이를 목에 걸친다. 놀라워라. 내 손이 알아서 척척 넥타이를 매기 시작하다니. 기억은 없지만 대신 몸이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준비 완료! 이바지 꾸러미들을 실고서 시동을 켠다.
결혼식장에 도착해 보니 벌써 몇몇 하객이 와 있다. 아들은 급히 자리에 앉아 축의금을 받는다. 식권을 담당하기로 했던 외조카는 아직 보이지 않다. 연락해 보니 이제 막 집에서 나섰다고 한다. 하객들은 밀려들고 아들은 분주하다. 내 마음도 급해진다. 포정해우... 포정해우... 속으로 분주한 마음의 불길을 잡는다. 이윽고 다른조카가 대신 자리에 앉았다. 휴~ 다행이다.
‘아버님, 식장으로 들어오세요.’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예식장으로 입장했다. 꽉 찬 하객들, 친구, 직장 선후배들, 친지들, 제자 얼굴까지 얼핏 얼핏 보인다. 내 앞에는 새신랑이 떨린다면서 입장 대기한다.덩달아 나까지 심장이 쫄깃해진다. ‘어라, 조금 떨리네. 젠장...’ 표정이 굳어짐이 느껴진다. 부디 ‘포정해우’. 신령한 기운에 맡기자. 그저 의탁하자.
신랑 입장에 이어 반짝이는 공주옷을 입은 신부가 문이 열림과 동시에 들어온다. “오늘의 주인공, 신부입장입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딸의 손을 잡고서 난생처음 런어웨이를 한다. 천천히 천천히 걸어가자. 옆에는 웃고 있는 지인들 얼굴이 보인다. 앞에 서 있는 신랑의 손에 딸의 손을 건네준다. 아비로서의 찹찹함, 서운함. 그런 것 없다.그저 천천히 걸을 뿐이다.사위에게 딸의 손을 넘긴다. 부디 진짜 인생을 시작하려는 두 청춘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간단한 주례 말씀과 축가, 사진 찍기의 행렬. 결혼식이 끝나간다. “자, 자 웃으세요, 여기 보시고” 사진사의 말에 어색하게 웃음 짓는다. 이 와중에도 누가 와었나.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안돼, ‘포정해우’에 어긋나잖아. 마지막 결혼식 경비 정산이다. 축의금을 세는데 딸이 제 몫이 궁금하다며 얼쩡댄다. 살짝 괘씸하다. 예전 우리 세대는 모든 것이 결혼 경비를 부담한 부모의 몫이라 여겼는데 말이다. 세대가 다르니 풍습도 달라진 모양이다. 그저 새 신부가 알뜰하게 살림을 잘하길 바랄 뿐. 다시금 ‘포정해우’를 따라야겠다.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차를 마신다. 순간 다른 이들의 결혼 때면 나는 어떤 마음으로 축하를 했는지 생각한다. 인색했던 내 모습과 미안한 몇몇 친구들이 떠오른다. 역시 세상살이는 배움이랴 싶다. 오늘 하루 ‘포정’처럼 마음의 칼을 하늘의 흐름에 맞게 썼는지 모르겠다. ‘그저 따를 뿐’이라는 백정 포정, 아니 장자 선생의 말씀이 묵직하게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