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학년도 수능 제출 시작품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눈이 내린다. 그동안 따뜻했던 겨울이었다. 기상이변이 더 이상 이변이 아닌 세상. 바닥에 안착한 눈이 스르르 자취를 감춘다. 사선으로 하강 중인 눈이 뺨을 스친다 . 가방을 메고서 인근 대학 도서관으로 걸어간다. 새해가 되면 제례처럼 행했던 나만의 작은 행사. 수능 국어영역 문제를 탐색하는 날이다.
전역을 기다리는 말년 병장처럼 교사로서 남은시간을 헤아려본다. 조금 더 교탁에 서서 맡겨진 수업을 감당해한다.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수능 국어영역을 풀어봐야 한다. 학생들에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2025학년도 국어영역 시 문학으로는 장석남의 <배를 밀며>와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이 출제되었다. 이 두 편의 시와 함께 이광호의 수필 <이젠 되도록 편지 안 드리겠습니다>가 세트로 묶여서 나왔다.
학생들에게 시문학을 설명할 때면 알음알이가 부족하여 내심 쩔쩔매곤 했다. 시를 가르친다? 가능한 일이 아니다. 어찌 보면 시에서 정답을 찾는 것부터가 가당치 않다. 하지만 어쩌라. 알량한 시 이론에 헛바람을 넣으며 화자, 대상, 시적 분위기, 수사법 등을 운운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혼자 가는 먼 집>이 눈길을 끈다. 허수경 시인의 작품이다. 허. 수. 경. 이름이 곱다. 그녀의 명성은 들은 바 있지만 정작 그녀의 작품을 진지하게 읽어본 기억이 없다. 단지 2018년 와병으로 이국땅 독일에서 숨졌다는 시인에 대한 단신이 생각나는 정도다. 1964년 진주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나보다 한 살 많은 동세대의 작가다.
시를 비롯한 동화, 소설, 산문 등 다양한 문학 영역을 넓히던 작가는 왜 독일로 유학을 떠났을까? 게다가 <고대 근동 고고학> 전공이라니. 시인의 속셈은 무엇이었나? 지구 반대편 독일 뮌스터 대학 강의실에서 흙 속에 묻힌 역사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던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겠다. 창밖에 눈발이 짙어져 간다.
<혼자 가는 먼 집>, 매력적인 제목이다. 시는 시어가 행을 거쳐 연으로 직조된 추상물이다. 알쏭달쏭한 추상의 내용을 쥐어짠 최종물이 제목이다. 다시 한번 읽어보자. '혼자 / 가는 / 먼 / 집 ' 멀리서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밀려온다.
시를 읽다가 멈칫한다. 킥킥이라니... 도저히 지나칠 수 없다. 화자는 만날 수도, 볼 수도 없는 당신을 부르다가 느닷없이 킥킥거린다. 이런 경우 반어적 표현이라고 학생들에게 일러준다. 킥킥은 사랑과 슬픔, 그리움이 뒤범벅인 마음 상태다. 꼬리를 물고 당신을 호명하다가 결국에는 웃어버린다. 요즘 말로 ‘웃프다’라고 해야 할까.
<혼자 가는 먼 집>은 그리운 이를 찾아가는 마음을 그리고 있다. 단풍, 은행잎, 개망초는 생성과 죽음이라는 순환의 법칙을 슬며시 말해준다. 흙으로 돌아간 당신도 그런 자연의 법칙에 따랐을 뿐이란 뜻인가? ‘이쁜, 좋지요’라는 시어와 ‘참혹’이라는 말로써 화자는 숙명적인 사랑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모든 감정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아니면 태양도 식어버리고 별들마저 풍비박살인 초신성의 대폭발이다. 다행하게도 폭발한 이별의 에너지는 성숙한 별을 탄생시키는 가스 덩어리로 거듭난다.
물음을 살펴보자. 2025년 수능 국어에서는 <혼자 가는 먼 집>은 작품의 대상인 ‘당신’의 의미 찾는 것과 제시된 보기의 조건을 참조해서 적절한 감상의 태도를 묻고 있다. 짐작컨대 수험생들은 어렵지 않게 정답을 찾았을 것 같다.
허수경 시인의 <혼자 가는 먼 집>은 시인들이 좋아하는 시라고 들었다. 몇 번을 읽어보아야 느낌이 오는 작품인 까닭에 좋다. 나태주 시인의 작품처럼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도 좋지만. <혼자 가는 먼 집>처럼 고개를 갸웃 뚱하게 하는 시는 매력적이다.
수험생들에게 <혼자 가는 먼 집>은 무슨 의미일까? 그저 23번, 24번, 26번. 숫자로만 기억될까. 스무 살 청춘이란 황금 세례를 앞둔 그들이 시를 곰곰이 감상해 보길 권하고 싶다. 머잖아 그들도 사랑과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최전선에서 알찔한 청춘의 이야기를 써야 하니 말이다.
마음에 새겨진 그리움은 별빛이다. 음... 사랑, 추억, 그리운 당신. 킥킥 웃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