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니아’는 멀리 있는 나라다. 이 나라에서 전운이 감 돈다고 뉴스가 전하고 있다. 십 수만의 러시아군이 이미 침공 준비를 마쳤단다. 미국이 잠자코 보고만 있을까. 전쟁이 발발하면 살상 무기가 굉음과 화염을 뿜을 것이고 숱한 꽃들은 꺾이고 뿌리마저 뽑혀 나갈 것이다. 살고자 하는 자들은 하늘을 바라보겠지. “당신은 어쩔 것입니까?” 물어도 답이 없다. 침묵이다.
머리가 지긋지긋하니 아프다. 소중한 생활의 양식을 책임지고 있는 야전부대가 고전 중이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처럼 그렇게 되었다. 신께 기도를 드려본다. 그곳을 고요하게 해달라고, 당신의 평화가 머물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여쭈어도 하늘은, 신은 답이 없다. 마치 아득한 수평선인 양 잔잔하고 고요할 뿐이다. 야속한 침묵이다.
엔도 슈사꾸의 대표작 『침묵』을 기억에서 호출한다. 이 작품은 신의 침묵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 빛나는 소설이다. 엔도 슈사꾸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 차례 거론되었던 위대한 작가다. ‘위대한’이란 수식어는 그에게 합당하다. 그가 쓴 『위대한 몰락』,『깊은 강』,『사해부근』,『숙적』을 읽어보라. 또 『예수의 생애』와『그리스도의 탄생』2부작은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의 신비를 아름답게 벗겨낸다.
『침묵』은 ‘신의 침묵’이란 화두를 깊게 가름한다. 우리는 선한 이웃이 고통에 처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팔자소관으로만 탓하기에는 그 모순이 이해되지 않는다. 성자들은 인과응보이며, 하느님의 또 다른 은총이라고 설득하지만 쉽게 납득되지는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딜레마이다. 전지전능하다는 '신의 침묵'. 엔도 슈사꾸는 작품 속에서 그 정체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침묵』의 색조는 검고 우울하다. “바다는 저편으로 음울하게 칠흑같이 펼쳐져 있고, 회색 구름 밑으로는 섬 그림자도 없습니다.” 예수회 신부인 로드리고와 가르페는 스승 페레이라 신부의 행방을 찾아 일본에 도착한다. 힘겹게 도착한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어두운 바다와 검은흙이다. 이들은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를 믿을 수 없었다. 결코 그럴 리 없다는 불안을 타고 포르투갈과 마카오를 거쳐 순교의 땅 일본에 도착했다.
“나는 약해요, 나는 모키치나 이치소우처럼 강한 자가 될 수 없어요.” 동료를 배반하고 살아남은 기치지로는 항변한다. 그는 신을 향해 소리친다.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느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억지이고 말고요.” 기치지로의 외침에는 내 소리도 들어있다. 타고난 그릇을 어쩌란 말이야. 내 안의 기치지로가 말을 한다. 대체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왜 그다지 침묵만 하십니까?
“신도들은 가난하고 약한 인간입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더 이상의 고통을 이제 더 내리지 말아 주십시오” 로드리고의 기도는 숨이 넘어갈 만큼 간절하다. 그의 고뇌는 지금의 시대에도 진행 중이다. 홀로코스트와 지중해 모래 벌에 떠밀려온 난민 아이의 시신 그리고 총탄에 죽어가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답니까? 과연 당신은 존재하는 것입니까? 소설 『침묵』은 응답 없는 신의 침묵을 향해서 도발적으로 질문한다.
“자네는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않은 가장 위대한 사랑의 행위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페레이라 신부는 배교 만이 저들을 살리는 길이요, 예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고문 속에 죽어가는 신자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로드리고의 배교뿐이다. 그가 신을 부인하면 저들은 살 수 있다. 결국 로드리고는 예수의 얼굴이 새겨진 성화를 밟는다. 바로 그때 로드리고에게 들리는 내면의 울림소리.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드디어 신이 침묵을 깨고 응답을 했다.
영화 <밀양>의 제목인 밀(密)과 양(陽)은 중의적이다. 지명(地名)이자, 삶의 신비인 ‘은밀한 빛’을 뜻한다. 연이은 최악의 불행에 빠진 신애. 그러한 그녀를 사랑하는 종찬. 그는 자신에게 무심한 그녀 곁에 머문다 항상, 언제나. 신애의 피아노 학원과 아이의 죽음 그리고 그녀의 광적인 신앙생활. 이 모든 순간마다 그녀 옆에는 그가 있었다. 아들의 살인범을 교도소에서 면회하다가 혼절한 신애를 안고 나오는 이도 종찬이요. 그녀의 자살 시도와 정신병원 입. 퇴원도 종찬의 몫이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신애는 종찬의 더운 가슴에 답하지 않는다.
그녀 옆에 있는 종찬은 사랑이다. 그래서 영화의 포스터 카피가 ‘이런 사랑도 있다’이다. 종찬은 신애의 비극적 고통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저 언제나 곁에 머물 뿐이다. 영화 속 종찬이 바로 “은밀한 빛” 곧 사랑이다. 신의 사랑은 볼 수도,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다. 그저 ‘침묵’으로 답을 한다.
‘울지만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 신부의 삶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의사의 꿈을 접고 세상에 가장 낮은 곳에 머물면서 가장 낮은 이들을 위해 살았다. 그러나 10년쯤 지난 어느 날 암으로 돌아가신다. 그는 죽었고 남겨진 아프리카 수단 아이들은 슬퍼했다. ‘울지만 톤즈’는 아이들과 펑펑 울면서 본 영화이다. 극장을 나서는데 아들이 내게 물었다. “아빠, 왜 하느님은 착한 사람을 살리지 못해?”냐고.
작년에 ‘유퀴즈’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았다. 진행자 유재석 씨 옆에는 이태석 신부의 제자라는 한 흑인 청년이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의사 수업을 마치고 곧 수단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곳 수단에는 제2의 이태석을 꿈꾸는 40명이 넘는 의대생들이 있단다. 그들 대다수는 이태석 신부처럼 밀림 속 가장 낮은 곳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눈물이 핑하니 돌았다. '아 - 사랑은 그런 거였구나.' 사랑은 ‘위대한 침묵’과 함께 한다는 삶의 신비가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