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 강물의 소리가 들리나요?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by 박신호

밤사이 메마른 땅에 복스런 비가 내렸다. 청량한 기운이 가득한 봄날이다. 광주를 벗어나자 멀리서 나주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아침 햇살에 드들강 물비늘이 반짝인다. 일찍 출발한 탓인지 여유롭다. 잠시 강변에 차를 멈춘다. 폐 가득 한껏 상큼한 공기를 흡입한다. 시계를 보면서 해찰하듯 강변을 걷는다. 어제 내린 비로 불어난 강물 내음이 비릿하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요즘 읽고 있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강이 당신에게 말을 한 것이오. 강은 당신의 친구가 되어 당신의 이야기를 할 것이요.”라고 주인공 싯다르타는 독백한다. 눈을 감고 강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아침의 고요가 침묵으로 들려온다. 청둥오리들의 날갯짓 소리는 부드럽다. 새들이 수면 위로 낮게 날자, 강은 그 날개의 진폭에 놀랐는지 물 위에 동그란 파문을 새긴다.


십수 년 전에 읽었던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를 다시 읽고 있다. 대통령 선거는 끝났지만, 열탕이 된 마음은 쉽게 식지 않는다. 화탕지옥을 벗어나고 싶다. 그래서일까? 『싯다르타』을 다시 집었다. 종이를 넘겨 가면서 읽는다. 차츰차츰 호흡의 높이가 낮아진다. 좋은 책에는 맑은 기운이 있다. 그 기운을 받으면 상처도 치유된다. 그 치유의 에너지를 몸으로 느끼는 중이다. 훌륭한 테라피이다.

헤르만 헤세는 청춘의 동반자였다. ‘라떼~’는 그랬다. 군대에서 경상도가 고향인 선임병과 밤새워 헤세의 『지와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을지훈련이 한참인 참호는 캠퍼스였고 우리는 골드문트와 나르치스 덕분에 지겨운 훈련도 잊을 수 있었다. 헤세의 『데미안』에서 아브락사스는 미지의 세계였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대학을 졸업 후에 이 아브락사스를 체험했다. 하지만 알은 두꺼웠고 내 부리는 약했다.

MB 정부 시절. 사대강을 지키는 단체로부터 ‘한강 걷기 동참 요망이라는 문자가 왔다. 새벽에 서울 가는 첫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싯다르타』를 읽었다. 싯다르타가 친구 고빈다와 헤어질 때는 톨게이트였고, 카밀라와 사랑을 나눌 때는 휴게소였다. 강남 고속터미널에 도착할 무렵에는 싯다르타가 뱃사공 바스데바와 함께 강물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12월 찬바람 속에 만난 우리는 기러기 떼가 되어 한강을 바라보며 말없이 걸었다. 겨울 강은 쪽빛으로 빛났고, 경찰 몇 명은 우리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나는 생각할 수 있고, 기다릴 수 있고, 단식할 수 있습니다.”라고 되뇌곤 했다. 중요한 것일수록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 싯다르타의 이 세 가지는 진리를 모시기에 충분조건이다. 일할 수 있고, 기도할 수만 있어도 은총이란 말이 있다. 그 단순함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하루를 살고 싶다.

싯다르타에게 스승은 강이었다. 언제가 관옥 선생님께서는 “예수, 노자, 석가와 같은 성자들의 스승은 누구겠냐?”며 물었다. 답을 궁리해 보는데, 어떤 벗이 “자연입니까?”라고 말했다. “그렇죠. 자연이 스승이에요.” 관옥 선생님께서 빙그레 고운 미소로 말했다. 스승은 제자가 준비될 때만이 나타난다고 한다. 스승을 만나지 못한 인생은 매우 슬프다.


싯다르타는 친구 고빈다와 함께 사문이 된다. 이들은 부처 고타마를 친견했건만 싯다르타는 부처 곁을 떠난다. 그는 ‘불타가 나를 앗아갔다’는 말을 남기고 고빈다에게 작별을 고한다. 싯다르타의 스승은 거리에 있었다. 그는 아름다운 카밀라 품에서 애정의 쾌락을 알게 되고, 상인 카마스와미를 통해서는 재물과 세상 이치를 터득한다. 활활 타는 불도 때가 되면 사위어진다. 싯다르타는 갈애의 허망을 깨닫게 된다.

이제 싯다르타는 선재동자가 되었다. 그는 계속 방황했고 세상을 걸었다. 마침내 운명은 싯다르타에게 도반을 보내준다. 그는 뱃사공 바스데바와 더불어 강물에 귀를 기울인다. 종일 침묵 속에서 강물의 소리를 들었고, 강물의 소리를 보았다. 이들은 강물에게 위로를 받았고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음도 배운다. 바스데바는 “강물의 소리 안에는 삼라만상의 목소리가 깃들여 있다”며 싯다르타에게 낮은 소리로 말한다.

어느 날, 바스데바는 ‘강물이 내는 소리의 정체’에 대해서 싯다르타에게 묻는다. 이윽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싯다르타의 귀에 그 소리를 들려준다. “옴~”. 삼라만상 자연이 내는 진리의 소리, 우주의 하모니다. 두 사람은 현자가 되어갔다. 싯다르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손님이 찾아왔다. 사랑하는 카밀라가 남긴 그의 유일한 혈육이 왔다. 핏줄이 주는 애정과 상실까지 경험한 싯다르타는 비로소 강물이 되었다. 다시 만난 친구 고빈다는 투명해진 싯다르타를 향하여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싯다르타처럼 투명하고 맑은 영혼을 알고 있다. 그는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뱃사공을 염원하며 천일 기도에 정진했다. 기도 회향을 마친 그는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시간 동안 걷고 또 걸었다. 그는 헤세의 <싯다르타>의 애독자다. 순례길에서도 자주 읽는다고 했다. 실상사 회주인 그는 길 위에서 생명을 찾고 있다. 그에게 헤세의 『싯다르타』는 진리의 음성이었다.

봄날의 드들강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강물과 이별할 시간이다. 차에 시동을 켠다. “웅~”하는 시동 소리가 순간 “옴~”으로 들린다. 환청인가? 아무튼 좋다. 오늘은 맑은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