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감독 차례가되었다. 과목은 수학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교실에 들어간다. 고요함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책상에 엎드려 억지 잠을 자는 녀석들도 보인다. 똑같은 번호로 내리 표기된 답안지도 잠들어 있다. 이른바 ‘수포자'들이다. 백 분에 걸쳐 실시되는 수학 시험은 도전하는 소수와 포기한 다수가 함께 견뎌내는 시간이다.
‘버킷리스트’는 죽기 전에 해야 할 목록을 뜻한다. 내게도 몇 가지 버깃리스트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수학 공부다. 때늦은 이런 결심은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어느 날 TV를 보는데, 이름 높은 초대 손님이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인류 문명사의 기념비라며 경탄하듯 말을 했다. 그 최상의 찬사에 바로 다음 날 도서관을 찾아갔다. 잠시 후, 그곳 서가에서『프린키피아』를 찾았다. 오~『프린키피아』! 라며 반가움에 책을 쫙~ 펼쳤다... 가 곧바로 덮어버렸다.
『프린키피아』는 뜻 모를 기호와 그래프의 세계였다. 실로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숫자였다. 게다가 곡선과 직선으로 가득 찬 암호의 제국이었다. 책은 '감히 어디를 넘봐?'라는 듯 나를 비웃고 있었다. 그랬다. 『프린키피아』는 감히 나 따위가 읽을 책이 아니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도서관을 나오는 데, 마치 등 뒤에서 뉴턴 선생께서 잘 가라며 웃는 것 같았다.
학창시절, 수학은 여름철 극장가의 공포물처럼 두려운 것이었다. 숫자가 없는 세상이 있다면 그곳으로 이민 가고 싶었다. 수학 없는 세상이 ‘유토피아'라고 믿었다. 대학 전공 선택도 수학을 피하는 것이 기준일 정도였다. 다행하게도 수학과 거리가 먼 국문학과로 진학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수학은 대학 입학과 동시에 먼 외계행성으로 사라져 버렸다.
내 곁에서 수학은 사라졌고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은하계에나 있어야 할 수학이 다시 나타났다. 그것도 “수학은 자연의 언어이다.”라는 멋진 아포리즘과 함께. 이는 찬란한 햇빛과 밤하늘의 별과 달 심지어 푸른 파도에도 수학이란 언어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숫자와 기호로 이루어진 수학이란 언어는 조물주가 시간과 공간을 창조할 때부터 사용한 도구인 셈이었다. 또한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신이 창조한 언어 설명서라는 것이다.
수학이 멋진 언어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가 멋있게 보이는 것처럼. 숫자의 세계는 꾸밈이 없고 정직하다. 형용사와 부사처럼 곱상한 허언증이 없다. "잘했다, 못했다”라는 말의 경계는 흐릿하지만, “1등이다”, "100등이다"라는 숫자의 질서는 엄격하다. ‘적당히, 잘, 매우’ 등과 같은 모호한 표현을 질색하는 것도 수학이다.
내가 수학 때문에 고전한 것은 국민학교 시절, 일곱 차례의 전학과 관계 깊다. 전학을 가고 나면 새로운 학교 분위기를 익히는 것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래도 산수(算數) 공부보다는 쉬웠다. 전학생 한 명을 위해서 이미 끝나버린 단원을 복습해 주는 자상한 학교는 없었다. 어려운 형편 탓에 학교 말고는 딱히 다른 배움을 얻을 수 없었다. 그렇게 부모님을 따라서 학교를 옮길 때마다, 나의 산수 실력은 눈부시게 망가져갔다.
4당 5락이라는 고3 시절. 결국 수포자를 선택했다. 차라리 수학 말고 다른 과목에 힘을 쏟기로 했다. 수학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수학 시간에 다른 과목을 공부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잠시 어이가 없어하더니, 무응답으로 휑하니 지나갔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뜻이었다. 무시는 꾸중보다 마음을 가난하게 만드는 법이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복도에서 마주친 수학 선생님은 “정말 수학 포기? 허락하마, 다른 학생들 모르게 해라”라고 말했다. 특히, “다른 학생 모르게”라는 목소리는 지금도 따스하게 기억된다.
학창 시절, 우울의 근원은 수학이었다. 숫자는 늘 머리 밖으로 튕겨 나가기 일쑤였고, ‘해법’이니 ‘정석’이니 하는 유명 수학 교재는 주역만큼이나 난해한 비결서였다. 대학에 입학 후에야 수학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과연 수학 없는 세상은 유연했고 평화로웠다. 게다가 능력자인 계산기가 곁에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수포자로서 평온하게 지냈던 어느 날, 『문명과 수학』이라는 EBS 5부작을 시청하게 되었다. 복잡한 계산보다는 수학의 다양한 세계를 영상으로 보여주었다. 시청하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골치 아픈 미적분의 시조가 라이프니찌 아니면 뉴턴인지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했다. 미적분은 우연하게도 뉴턴과 라이프니찌가 비슷한 시기에 알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어쩌다 마주친 미적분의 탄생이었다.
방송 진행자는 “미적분이란 움직이는 것을 계산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학생 때는 미적분이라는 단어만 보아도 의식을 잃곤 하였는데, 이번에는 미적분의 의미가 딱하니 이해되는 놀라운 기적이 벌어졌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말씀하신 공자님도 흐뭇할 사건이었다.
노년의 버킷리스트에는 텃밭 가꾸기와봉사하기, 클래식 정복하기와 글쓰기가 들어있다. 이제 한 가지 더 수학 공부를 추가한다. 백발을 넘기면서 연필을 쥐고 공식을 열심히 외우는 학생이 되어 보련다. 기꺼이 초, 중등 수학 교재도 사야겠다. 요즘은 유튜브, 인터넷 강의도 있으니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손주가 “지금 뭐 해?”라고 맑게 묻는다면, 할아버지는 수학 공부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내가 대견스러울 것이다.
의식이 세월에 풍화되기 전에 “수학은 자연의 언어”라는 오묘한 이치를 몸으로 체득하고 싶다. 다음 생의 목표는 수학박사가 어떨까 싶다. 죽은 다음 일이니 누가 알겠는가? 믿거나 말거나 일뿐이다. 혹시.. 만약에.. 진짜로... 수학을 잘하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행복한 김칫국을 실컷 마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