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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라 피어라 이팝나무꽃들아

by 박신호

이팝나무꽃이 하늘거리고 있다. 화사하게 피었던 진달래와 철쭉이 사라진 봄날의 공원. 이젠 하얀 이팝나무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이팝나무의 하얗고 길쭉한 꽃술이 월남미(越南米)와 닮아있다. 밥알 닮은 꽃, 예부터 이팝나무에 꽃이 무성하면 풍년이 들 징조라고 했다.


‘흰쌀밥과 고깃국’은 민중의 영원한 소망이다. 조선의 개국은 이러한 염원을 위한 혁명이었다. 새 나라 조선은 여말, 권문 세력가들의 거센 저항을 뚫고, 토지개혁을 내세우면서 세상을 바꾸었다. 몽실몽실 김이 오르는 밥상을 마주한 백성들은 쌀을 닮은 이팝나무꽃을 가리켜 ‘이 씨가 내려준 밥’이라며 감격했다.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이 꿈꿔온 민본(民本) 실현이 이팝나무꽃처럼 주렁주렁 피어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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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본을 향한 정도전의 첫걸음은 전라도 땅에서 시작되었다. 우왕 1년, 삼봉은 천민 거주지였던 나주 회진현 거평부곡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삼 년에 걸친 유배 생활 속에서 민중이 근본이 되는 새 시대의 밑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훗날 정도전은 이때 그린 혁명의 초안을 가슴에 담고서 동북면의 맹주 이성계를 찾아간다. 마침내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는 순간이 도래하고 있었다.


늦은 봄날의 햇살을 받으며, 흐늘거리는 이팝나무 아래로 길을 나섰다. 삼봉 정도전의 유배터 답사를 위해서였다.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 유배지로 가는 길이 쉬울 거라는 헤아림은 섣불렀으니, 뜻밖에 영암 부근에서 우회하는 등 복잡한 경로였다. 한 시간을 훌쩍 넘는 운전으로 나른해질 무렵, ‘삼봉 정도전 선생 유배지 1.2Km’라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백동마을 초입에 들어섰다. 마을 회관을 지나가는데 오래된 비석이 보였다. 삼봉의 유배 내력과는 무관한 열녀비였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보니 도올 김용옥 선생이 쓴 <신소재동기(新消災洞記)>가 서 있었다. 오래전 도올 선생이 정도전의 <삼봉집>의 주해서를 출간했던 기억이 났다. 읽어보니 도올 선생 특유의 격정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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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선생의 <신소재동기>는 필사를 하고 싶을 만큼 명문이었다. 차츰 정도전의 흔적이 느껴졌고, 설렘으로 삼봉의 유배터로 향했다. 좁은 마을 길은 논을 끼고서 뱀처럼 이어져 있었다. 낮은 경사길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저만치 대나무가 우거진 구릉 위에 있는 소박한 초가집 한 채가 보였다. 바로 정도전의 유배터였다.


유배터로 걸어가면서 격동의 고려말을 떠올려보았다. 정도전의 유배는 우왕 1년에 벌어진 사건으로서, 친원 권문세도가 와 친명 신흥사대부의 갈등이 원인이었다. 당시 공민왕은 자신이 임명했던 개혁의 중심 신돈을 제거하지만, 이는 오히려 멸망을 재촉하는 방아쇠가 되었을 뿐이니, 개혁의 동력을 상실한 고려는 이색 문하의 몇몇 사대부들의 충심으로 겨우 연명하는 지경이었다. 그렇게 어둠은 밀려오고 있었고, 그 뒤로는 새로운 세상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여말, 민중의 삶은 왜구와 홍건적으로 이어지는 변란과 권문세가들의 전횡으로 몰락 그 자체였다. 보다 못한 조준은 토지개혁의 시급함을 고하는 상소문에서 “불쌍한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개천과 구덩이에서 죽어가도다”라며 고발하고 있다. 당시 70~80여 가량의 권문 세력가들은 소작인에게는 8~9할의 소작료를 뜯어가면서, 정작 자신들은 각종 부역 면제는 물론이요, 세금 한 푼 내지 않았다. 극도의 불공정, 불의에 절망한 사회는 더 이상 고려를 원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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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5년 삼봉 정도전은 북원 사신을 마중하라는 조정의 명을 받게 된다. 반발한 그는 실세 이인임과 경복흥을 찾아가 북원 사신의 목을 베거나 오라를 지워서 명나라로 보내겠노라며 소리쳤다. 결국 이 사건으로 삼봉은 유배를 떠나게 된다. 유배 직전, 경복흥의 마지막 회유도 있었지만, 삼봉은 끝내 거부하고 만다. 이에 정도전을 겨냥한 권문세도가들의 앙심은 깊었으니, 삼봉이 개경으로 돌아오기란 아득한 일이었다.


개경을 떠난 정도전은 나주에 몸을 의탁하게 된다. 유배지에 도착한 삼봉은 그곳 토박이 민중들에게서 받은 문화적 충격은 감동에 가까웠다. 정도전이 남긴 <소재동기>를 보면 지역 민중들의 따스한 인간미를 실감 나게 적고 있다. 또한 <답전부>에는 어느 무명 씨 농부와 나눈 대화를 통해서 자기 성찰과 더불어 그의 탄복할만한 유식함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거평부곡 민중들은 개혁가 정도전을 포근히 안아 주었다.


정도전이 감동했다는 정체는 호남의 넓은 수용성 또는 포용력이라고 생각해 본다. 구례에 터를 잡은 부산 출신 평화운동가 한 분을 알고 있다. 그는 주역 학자이면서, 보따리 학교라는 대안 교육을 실천했던 평화 일꾼이다. 한동안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깊은 산골에서 살았던 희유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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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그는 전라도의 힘은 단연 포용력이라고 평했다. 자신의 고향 부산은 대안적 삶을 용납하지 않았고, 그저 정신 나간 사람 정도로 취급하더라는 것이다. 반면에 전라도는 타자인 자신의 가족을 마을공동체 일원으로 받아주는 너른 품에 감동했다고 했다. 호남의 너른 포용력이란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삼봉 정도전은 이러한 호남의 포용력에 매료되었던지, <소재동기>에서 거평부곡에서 알게 된 ‘황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동리 사람들은 순박하고 허영심이 없으며 힘써 농사짓기를 업으로 삼는데, 그중에서도 황연은 더욱 그러했다. 그의 집에는 술을 잘 빚고 황연이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술이 익으면 반드시 나를 청하여 함께 마셨다. 손이 오면 언제나 술을 내여 대접하는데 날이 오랠수록 더욱 공손했다....”


그 외에도 삼봉은 김성길 형제, 떠벌이 승려 서안길, 김천부와 조송 등 이들의 정겨운 인간미를 기록하여 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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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상념에 잠긴 채, 유배터에 도착해 보니, ‘삼봉 정도전 선생 유허비’가 나를 맞이해 주었다, 유허비 뒤로는 정도전이 머물던 초사(草舍)를 복원한 초가(草家) 한 채가 외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유허비에는 1988년에 삼봉의 유배터임을 확인한 후, 2010년에 한 칸 규모로 초가를 조성했다는 내력이 적혀 있었다.


복원된 정도전 초가집을 둘러보았다. 허술한 집은 판자를 얽어서 사립문을 내었고, 대나무로 울타리를 두른 형태였다. 방 한 칸, 마루 한 칸이었다. 잠시 토방에 앉아 들판을 바라보니, 이곳에서 좌절과 희망을 맛보았을 삼봉의 심정이 와닿았다. 토방에서 일어나 문틈으로 방안을 엿보았다. 벽 중앙에는 삼봉 정도전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혼자서 유배지를 거닐고 있었는데, 뭔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졌다. 유배터와 허름한 초가에는 허전함과 쓸쓸함만이 가득할 뿐, 정도전의 민본사상을 엿보기에는 너무나 빈약했다. 나는 이곳에 정도전의 생애와 정신을 담은 소박한 기념관이라도 있으면 어떨까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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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거름이 내리자 백동마을에서 다시 길을 나섰다. 어두운 시대, 가장 낮은 이곳에서 빛을 밝혔던 정도전을 생각해 본다. 안타깝게도 그는 재상 중심의 민본국가를 눈앞에 둔 채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렇게 ‘하얀 쌀밥에 고깃국’으로 상징되는 삼봉의 정치실험은 미완의 역사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민본사상은 이후 세종조의 치세와 세조의 경국대전 등으로 이어지면서 오백 년 조선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다.


2023년 대한민국. 정도전이 나주에 유배온 이래 칠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의 갈등은 여말의 혼란과 닮아있다. 광장에서 일어나는 태극기와 촛불 시민들의 대결, 날로 커져만 가는 빈부격차. 세계가 놀라워하는 기록적인 저출산율. 미. 중 패권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길을 잃은 외교와 북의 핵 위협과 일본의 재무장 등. 이런 비상한 시절이건만 국가 에너지는 갈등에 소모되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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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호남은 혼돈의 시대마다 민족의 나갈 방향을 제시했다. 문득 충무공의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는 말이 떠오른다. 갈등에 휩싸인 이 땅에 희망을 가져다줄, 새 시대의 삼봉 정도전을 호남은 기다리고 있다. 무성하게 매달릴 이팝나무의 꽃을 다시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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