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께서 시몬을 눈여겨 보시며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냐? 앞으로 너를 케파라 부르겠다”하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장 42절) -
#1
미사 시간, 집전하시는 신부님 제의가 붉은색이다. 오늘은 성지(聖枝)주일이다. 예수의 수난을 기리는 성주간이 시작되는 날이다. 예수의 수난은 제자의 고발이 빌미가 되었다. 예수는 끌려가 고문를 당했다. 예수가 ‘케파’라 불렸던 으뜸제자 베드로마저 ‘그를 모른다’며 스승을 부인했다. 닭울음 소리에 통곡을 했다는 베드로는 심약한 제자였다.
예수는 베드로를 제자로 삼으면서 그의 이름을 ‘케파’로 바꿔주었다. 케파란 ‘반석’을 뜻한다. ‘반석’은 기초가 되는 평평하고 넓은 바위다. 장차 베드로가 걸어가야 할 길을 암시한다. 고문을 당하고 있던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에게 예수는 왜 ‘반석’이라는 듬직한 이름을 주었을까?
#2
예전에 어느 선생께서 말했다. 모든 이름에는 고유한 파장이 있다고. 호칭은 일종의 주력(呪力)이란 이야기다. 일리가 있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녀가 태어나면 소중한 이름을 선물하고자 애를 쓴다. 늦은 밤, 잠든 예쁜 아기를 바라보면서 작명을 하는 아빠, 엄마의 모습은 맑고 투명하다.
간혹 못된 부모의 이름짓기도 있다. 샹송의 여왕 에디트 삐아프의 경우가 그렇다. 그녀의 이름은 총을 맞고 살해당한 어느 독일 간호사의 이름이다. 천하에 몹쓸 아빠가 막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그렇게 정했다. 그래서일까? 에디트 삐아프의 일생은 이름만큼이나 불행했다. 그녀의 <장미빛 인생>는 슬픈 인생 찬가이다.
#3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 입학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께서 “성찬아”하고 나를 불렸다. 아버지는 내일부터는 이름이 바뀐다고 했다. 새 이름은 믿을 신(信)과 넓을 호(浩). "박신호"였다. 집안의 항렬 탓에 “성찬”이 “신호”가 되었다. 큰아버지의 통보가 있었다고 아버지는 미안해 하셨다.
그나저나 ‘신호’라고? 어! <신호등>과 발음이 같지 않은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역시나 몹쓸 녀석들 몇이 <신호등>이라며 놀려댔다. 다행히도 이름 콤플렉스는 4학년 때 사라졌다. 담임 선생님께서 "좋은 이름은 상대가 기억을 잘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다음 날부터 <초록 신호>, <빨간 신호>, <노란 신호>라 불려도 상관하지 않았다. 개구쟁이들도 내 무반응에 흥미를 잃고 시들해졌다. 세월이 지나서, 머리에 하얀 눈이 쌓인 동창 녀석에게 말하니, ‘그런 일이 있었냐’라며 기억을 못 했다.
#4
천주교 세례를 삼십삼 년 전에 받았다. 그해 부활절이 세례를 받는 날이었다. 날짜가 다가오자 내가 받게 될 세례명이 궁금했다. 세례명이 나왔는데 “브루노”라 했다. ‘브루노?’라고~라?' 안 될 이름이다. 사무실에 가서 다시 세례명을 받고 싶다고 했다. 사무장님은 이유를 묻더니 그럼 스스로 세례명을 지어보라고 했다.
<브루노>라니? ‘불독’이란 개가 연상되는 발음이 아닌가 말이다. 집에 가서 성경을 뒤졌다. 작명가의 심정으로 이름을 찾았다. 마침 예수의 시신을 자신의 묘에 모신 아리마테아 요셉이란 인물이 눈에 번쩍 띄었다. 세례날, 내 명찰에는 <아리마테아 요셉>이 적혀있었다. 그는 내 주보 성인이며 축일은 3월 17일이다. 정작 영명 축하는 3월 19일에 더 받는다. 그날은 마리아의 남편이신 성 요셉의 축일이다.
대학원 논문이 인연이 되어 절에 다니게 되었다. 사연은 구구하지만 그렇게 되었다. 대행스님이 계시는 <한마음선원>에서 수계를 받았다. 안양 본원에서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바하”라는 참회 진언 속에 연비를 하였다. 계명은 클 원(元)과 물 황(滉)의 '원황'이었다. 조금은 ‘아리마테아 요셉’ 성인께 미안했다.
#5
김지하 시인의 시집 가운데 <화개>라는 작품이 있다. 시인의 삶에 대한 실망과 달리 <화개> 는 내가 아끼는 시집이다. 꽃 화(花), 열 개(開). ‘꽃이 피어난다’ 얼마나 아름다운 제목인가? 이 <화개>를 별칭으로 삼기로 했다. 어떤 모임에서 인사 할 때면 <화개>라고 소개한다. 어떤 이는 화개장터의 화개냐?고 묻는다. 그럴때면 맞다며 놀라워한다. 어느새 <화개>는 나의 또다른 이름이 되었다.
옛사람들은 자(字)와 호(號)를 가졌다. 자는 성인 된 남자의 별칭이며, 호는 상대를 허물없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화개>는 나의 호요, 자이다. 뭐 그렇다는 이야기다. <아리마태아 요셉>, <원황>, <화개>란 이름마다 삶의 흔적이 묻어있다. 모든 이름마다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름은 소중하다.
수업 전에 출석을 부른다. 과거에는 학생을 호명할 때 번호를 불렸다. 무지했고 무식했다. 언제부턴가 사람을 번호로 호명하다는 것이 불손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로 학생의 이름을 부른다. 김춘수 시인도 이름을 부를 때면 서로가 꽃이 된다고 했다. 시인의 말대로 이름은 꽃이다.
#6
예수는 심약한 베드로에게 ‘케파’ 즉 반석이라고 불렸다. 제자의 부족한 부분을 눈치채고서, 필요한 에너지를 이름 속에 담아주신 것이다. 훗날 ‘케파’라 불린 베드로는 로마에서 처형되었다. 오늘날 ‘케파’의 순교터에 바티칸 교황청이 위치해있다. 심약한 ‘케파’ 베드로가 그리스도 세계의 반석이 되었다니, 과연 예수는 놀라운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