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전할 때는 페니레인

< Penny Lane >, Beatles

by 박신호

맛있는 음식도 계속 먹다 보면 질리기 마련이다.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제아무리 흥겨운 노래라도 주야장천 듣고 있기란 어려운 일이다. 클래식이나 대중가요는 물론이고 팝 음악도 그렇다. 아바(ABBA)나 레드 제플린(Led Zepplin) 같은 그룹의 인기곡일지라도, 계속 듣다 보면 귀와 머리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틀스 음악은 분명 희한하다. 일단 이들의 노래는 지겹지 않다. 반복해서 들어도 즐겁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 혹시 멤버들의 소소한 일상을 담고 있어서는 아닐까? 비틀스의 음악 대부분은 존, 폴, 조지, 링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비틀스의 음악은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는 밥 딜런이나 웅장한 대하소설 같은 핑크 플로이드의 분위기가 아니다. 마치 한 편의 에세이처럼 생활의 사유를 담고 있다. 대표적으로 1967년에 발표한 <penny Lane>이 그러한 작품이다.


페니레인은 존 레넌과 폴 메카트니가 어릴 때 살았던 동네 이름이다. 이 곡은 리버풀 A562 도로 남쪽 거리에 위치한 페니레인과 사람들을 노래하고 있다. 노래 가사는 사진을 보여주는 이발사, 자동차를 탄 은행원, 모래시계를 가진 소방관, 쉼터에서 양귀비꽃을 파는 예쁜 간호사 그리고 거리의 생선 요리와 지나가는 연인 등 일상의 모습을 관찰자 시점으로 서술되어 있다.


페니레인이 위치한 항구도시 리버풀은 축구 클럽과 함께 비틀스의 고향으로 이름이 높다. 오늘날 이곳은 스트로베리 필즈, 에비로드 앨범의 유명한 횡단보도와 더불어 비틀스의 3대 성지로 꼽힌다. 페니레인은 리버풀비틀스 관광의 필수 코스라고 한다. 심지어 이곳을 방문한 관광객들 가운데는 이곳 거리 표지판을 훔쳐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 하긴 비틀스 팬이라면 페니레인 거리표지판을 가방에 담고 싶을 것 같다.

비틀스 덕분에 유명해진 페니레인의 지명은 흑역사에서 유래한다. 노예 중개상으로 악명 높았던 제임스 페니의 이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리버풀 시당국은 이곳이 유명해지자, 페니레인의 부끄러운 역사를 밝히고, 반성한다는 의미로 ‘국제 노예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단다. 이웃 나라 일본의 정치인들이 리버풀에 간다면 꼭 국제 노예 박물관을 들려보기를 추천한다.

누구에게나 어릴 적 마을과 사람들에 대한 추억이 흑백 사진처럼 있을 것이다. <penny Lane>은 그 빛바랜 사진을 수채화로 곱게 그리고 있는 노래이다. 이 곡은 1967년 싱글로 발매되어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 두 살 차이였던 존 레넌과 폴 메카트니가 웃고 떠들면서 걸었을, 페니레인 거리를 비틀스는 수필처럼, 수채화처럼 노래했다.


이제 나의 페니레인을 떠올려본다. 부계의 뿌리 고흥일까? 아니면 태를 묻었던 보성일까? 아니면 첫 국민(초등) 학생으로 입학했던 서울일까? 이 모든 곳이 그리 내키지 않다. 나의 페니레인은 푸른 바다가 반짝이는 곳에 있다. 지금도 그곳에는 어릴 적 동무들이 있고, 비록 고생을 했던 젊은 시절의 부모님의 숨결과 함께 아웅다웅하며 지냈던 친척들이 살고 있다.


그 옛날 청해진이라 불렸던 완도. 이곳이 나의 페니레인이다. 지금도 어쩌다 그곳 읍내에 가면 옛 시절의 포로가 되어 목적 없이 거리를 거닐곤 한다. 서울에서 어렵게 살았던 우리 식구가 완도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것은 작은아버지 덕분이었다.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고 사망했던 그해. 완도대교를 넘어가면서 바라본 남해 바다는 희망이요, 두려움이었다. 그때는 광주에서 완도까지 버스로 무려 네 시간 삼십 분이 걸렸다. 특히 해남에서부터 시작되는 비포장길은 춤추는 자이로스핀이었다.

해 질 녘, 완도에 도착한 우리 식구들은 다들 허리를 부여잡고 버스에서 내렸다. 비릿한 바다 내음과 뱃고동 소리가 우리를 환영하고 있었다. 나의 페니레인 완도는 비바람만 조금 세차면 전기가 끊어졌고, 이곳의 특유한 종결어미 말투인 ‘~했어라’의 용도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욕은 얼마나 찰지게 잘하던지... 그렇게 서울에서 이사 온 우리 식구는 이곳의 어휘와 말투, 독특한 몸짓 등을 익히고자 애를 썼다.


비틀스의 <penny Lane> 노래 가사처럼 내게도 잊히지 않는 동네 사람들이 있다. 개구리를 잡아서 꼬챙이에 꿰어 팔고 다녔던 ‘용칠이’ 아저씨. 용칠이라 불렸던 이분은 외모와 지능이 떨어진 탓에 어린 우리와 친구 먹었다. 짓궂은 우리들은 나이 많은 그에게 “용칠아, 용칠아”하며 놀려댔다. 그럴 때면 동네 어르신들은 용칠이가 실은 개구리를 팔아서 노모를 모시는 효자라며 우리를 꾸중하셨다.

또 다른 분은 군청 아래 동아서점 주인이시다.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그곳에서 김소월 시집을 고르자 주인께서 대견하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대학 진학 후 서점에서 만난 아저씨께서는 ‘어떤 학과를 다니냐?고 물었고, 국어국문과라고 했더니, 그럴 줄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10년 뒤, 우연히 마주친 아저씨는 내 업을 물었다. 국어교사라고 했더니 무릎을 딱! 치시면서 일찍이 시집 살 때부터 알아보았면서 좋아하셨다.

그리운 분들이 계속 떠오른다. 영미 식당 아주머니, 한의원 아저씨, 동물병원과 군청 아래 친구 이불집, 예술가 모자를 쓰셨던 코미디언 이주일을 닮은 우해바산 선생님도 그립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분들이지만, 추억의 램프에서 연기처럼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지금도 나의 페니레인에는 반가운 이들이 있다. 벌거숭이 꼬맹이들이던 동창 녀석들이다. 이제 친구들은 바닷바람에 익은 주름과 구릿빛 얼굴이 백발과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 “신호 니는 아직 젊게 보인다”며 환한 웃음을 짓는 친구들을 보면 알 수 없는 부러움과 미안함이 교차된다.

도시로 떠나지 않고 바닷 김과 미역, 전복을 생계로 삶을 가꾸며 이곳을 지켜준 벗들이 고맙다. 덕분에 나의 페니레인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이제 비틀스의 <penny Lane>를 노랫말을 바꿔 들어야겠다. 페니레인 대신 완도로 말이다.


<PENNY LANE>, The Beatles


In Penny Lane there is a barber showing photographs

페니 레인에는 사진을 보여주는 이발사가 있어요

Of every head he's had the pleasure to have known

그가 소중해하는 모든 사람들의 사진을 보여주죠

And all the people that come and go

그리고 오고 가는 모든 사람들은

Stop and say hello / 멈춰 서서 인사를 해요

On the corner is a banker with a motorcar

모퉁이에는 자동차를 탄 은행원이 있어요

The little children laugh at him behind his back

어린아이들은 뒤에서 그를 비웃죠

And the banker never wears a mac

그 은행원은 절대 우비를 입지 않아요

In the pouring rain, very strange

비가 쏟아져도, 아주 이상하죠

Penny Lane is in my ears and in my eyes

페니 레인은 제 귀와 눈 속에 있어요

There beneath the blue suburban skies

시외의 파란 하늘 아래 그곳에서

I sit, and meanwhile back / 전 앉았다가, 다시 돌아오죠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