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로 마스크를 꼭꼭 뚫어본다. 더운 날, 마스크를 쓰고 하는 수업은 곤혹이다. 50분 동안 쉼 없이 말을 하고 나면 찐 빠진다. 수업이 끝나면 마스크 안에는 입 냄새와 축축한 땀이 만들어 낸 콜라주의 향연이 벌어져 있다. 마스크를 벗고 뺨에 번져있는 땀을 닦는다. 마치 등산을 마친 기분이다.
마스크를 착용하면 발음이 둔탁해진다. 의식적으로 큰 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경사진 비탈길을 오르면서, 말하는 기분이랄까? 코로나 시대, 입으로 생계를 잇는 이들이라면 공감하는 고통이다. 이때 가장 혹사를 당하는 기관은 성대이다. 어느 날, 마스크에 바늘로 작은 구멍을 뚫어놓으면 호흡하기가 편할 것이라는 묘안이 떠올랐다. 오! 유레카 ~ 게다가 마스크에는 바늘이 지나간 흔적도 드러나지 않았다.
처음 마스크를 착용하고 수업했던 날이 떠오른다. 메르스가 유행하던 때였을 것이다. 교실에 들어가 보니 모든 학생들이 하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괴기스러운 풍경이었다. 미래의 우울한 지구에 도착한기분이랄까? 아무튼 메르스는 지나갔지만, 연이은 미세먼지 공습 탓에 마스크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코로나 시대가 도래하면서 마스크는 상수(常數)가 되었다. 이제 세상은 마스크 착용을 강권하고 있다.
#2
건축학자 유현준은 자신의 책에서 마스크를 쓴 사회를 두고 ‘텔레토비를 보는 듯 무섭다’고 말하고 있다. 텔레토비라면 90년대 ‘보라돌이, 뚜비, 나나, 뽀’가 나오는 어린이 인기 프로가 아니던가?' 그 시절 텔레토비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친구였다. 네 명의 캐릭터들이 내는 소리와 앙증맞은 몸짓은 깜찍하고 귀여웠다. 예리한 눈을 가진 유현준 교수는 텔레토비의 변화 없는 표정에 주목했다. 캐릭터들의 표정이 시종일관 똑같다는 것이었다.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다. 텔레토비의 표정은 그로테스크했다.
표정 변화 없는 텔레토비처럼, 마스크를 쓰게 되면 표정의 변화를 알 수 없게 된다. 감정의 흐름을 알아채기가 어려운 것이다. 입술과 입 주위는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근육이라고 한다.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감춘 얼굴은 무표정하다.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는데 제한을 받는다. 그래서일까? 마스크는 선글라스처럼 표정을 감추는데, 유용한 도구가 되어버렸다.
코로나 시대, 마스크는 우리에게 심리적 혼란(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마스크를 쓴 얼굴로 처음 만난 이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마스크를 착용한 상대의 이마와 눈만 보아도, 그 사람의 얼굴이 연상된다. 그리고 상상 속의 상대 얼굴을 진짜라고 믿게 된다. 하지만 마스크를 벗은 그이의 얼굴을 보면 깜짝 놀라고 만다. 전혀 알 수 없는 낯선 사람이기 때문이다.
#3
작년 하반기부터 함께 근무하게 된 여 교직원이 있었다. 그녀 역시나 마스크를 열심히 쓰고 다녔다. 며칠 전, 점심시간에 내 자리 앞에는 어느 낯선 여성이 식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자연스럽게 인사를 했다. 얼떨결에 답례는 했지만, 누군지 짐작되지 않았다. 정체 모를 이와 마주 보는 식사는 곤혹스러웠다. 드디어 식사를 먼저 끝낸 낯선 그녀가 마스크를 썼다. 그제야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 임 선생이구먼, 마스크를 벗으니 모르겠어’라며 미안함에 너스레를 떨었다.
이쯤 되자 의문이 생긴다. 그동안 마스크를 쓴 임 선생을 볼 때마다 머릿속에 또렷하게 연상되었던 그녀는 누구였을까? 업무를 공유하고 대화도 나누었던 상상 속의 그녀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분명 이목구비가 낯익었는데 말이다.... 혹시 나의 뇌가 창조한 아바타였을까? 의심해본다. 이 같은 경험은 마스크 시대에 흔한 현상이라고 한다. 코로나 시대가 가져온 우울한 착각일까?
답답함에 마스크를 확~하는 심정으로 벗어던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린 날 보았던 프로레슬링 한 장면을 떠올려본다. 어느 날 우리의 영웅 김일 선수와 일본의 타이거 마스크의 대결이 있었다. 이마가 붉은 선혈로 낭자해진 김일 선수가 연거푸 박치기로 일본 선수를 실시시키고, 그의 타이거 마스크를 벗겨낼 때, 우리 코맹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환호했다. "김일 만세"라고.
어디 어린아이들뿐이랴. 텔레비전이 귀하던 시절, 동네 어느 집 방 안에 옹기종기 모여 함께 시청하던 어른들도 “와!”하면서 박수를 쳤다. 찢어진 타이거 마스크를 손에 움켜 든, 김일 선수는 포효했고, 마스크가 벗겨진 불쌍한 일본 선수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링 밖으로 달아났다.
그때의 박치기왕 김일 선수가 벗겨낸 타이거 마스크처럼, 우리도 마스크를 벗어던질 날이 올까?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상기후에 따른 각종 괴질이 더욱더 만연할 것만 같다. 어디 코로나 변종뿐이랴. 원숭이 두창, 켄타우로스까지 이름마저 무시무시한 바이러스 전염병 소식이 들려온다. 게다가 밀려오는 미세먼지도 무시할 수 없으니 말이다.
#4
점차 마스크가 일상의 의복처럼 자리를 잡아가는세상이다. 이 계륵 같은 마스크와 어쩔 수 없이 동거를해야 한다면, 인간의 숨결을 담은 마스크로 변모되면 좋겠다. 서로의 표정도 볼 수 있고, 환경 오염도 되지 않은 그런 마스크를 말이다. 이런 마스크가 발명된다면 그 발명자는 노벨상 감으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사실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외로움이다. 다행하게도 마음의 질병인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 공간에 들어서면 마음이 따스해진다. 가족, 연인, 친구 등 믿을 수 있는 이에게만 허락된다는 45cm 공간 속에는 인간의 숨결이 들어있다. 이 공간에 들어서면 서로가 서로에게 천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스크의 종말을 알 수 없는 세상. 자칫 바이러스와 싸우다가, 인간의 따스함마저 잃을까 염려된다. 거리두기가 일상인 된 사회에서, 외로움은 코로나보다 무서운 질병인데 말이다. 비록 두 손을 마주잡는 것도 두려워하는 세상이지만, 서로에게 자신의 따스한 45cm 안을 허용한다면 팍팍한 삶을 견뎌내는 힘이 생길 것 같다.
그러니 부디 서로에게 졸지 말고, 우리 곁의 45cm을 공유할 수 있도록, 마음의 거리두기를 해제하면 어떨까? 가을이 다가오는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이런 계절에 마스크를 벗고, 어떤 선한 이에게 따끈한 커피라도 건네보고 싶다. 차 한잔으로 서로의 45cm가 열릴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