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이 늘어나고 있다. 건강, 자녀 취업, 직장 그런 문제가 아니다. 남들이 "애고~ 걱정도 팔자네"라거나, ‘아는 것이 병’이라며 혀를 찰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드라마에 몰입 중이던 아내에게 걱정을 살짝 말해 보았더니, ‘뭔 소리래?’라는 듯,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그리곤 다시 드라마 속 우영우 변호사에게 빙의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나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글로벌하며, 우리 미래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자면, 작년만 하더라도 존재감을 몰랐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이에 따른 곡물 및 자재값 상승. 중국의 대만 위협과 세계 반도체 수급 현황. 중,미 무역전쟁과 달러 패권 등 지구촌의 중차대한문제들이다. 하지만 이런 걱정을 남들에게 말한다면, 아마도 나를 맛이 간(?) 영혼으로 취급할지 모르겠다.
#2
이런 조짐은 작년, 한 마리의 동학 개미가 되어, 주식에 뛰어들고서부터였다. 늦깎이로 주식에 참전한 탓에 수익은 초라했지만, 처음으로 조우한 투자의 세계는 별천지였다. 호기심과 함께 경제 기사를 클릭하는 횟수가 늘어났고, 난해했던 금융 용어도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언젠가, 직장동료가 ‘주식은 도박이 아니겠냐’며 말했는데, 그 순간 그가 호모 에렉투스처럼 보였다.
이처럼 인식의 변곡점이 생기자, 세상을 경제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동시에 ‘십 년 전에만 이 세계를 알았더라면...’이라는 아쉬움에 한숨이 나왔다. 대통령 후보를 뽑을 때도 이념이나 지역보다는 경제 능력을 투표 기준으로 삼았다. 또한 경제와 정의를 동시에 잡는다는 kbs 홍사훈의 경제쇼의 열혈 애청자가 되어, 자본의 신천지를 열심히 탐색하였다.
그래서 돈은 좀 벌었냐고?섣부른 짐작은 마시길. 현재 내 수익은 코스피의 우울한 파란색만큼이나 마이너스 전선에서 장기간 대치 중이다. 이럴 때는 그저 ‘참는 자에게 복이 있냐니’라는 구절을 마음에 새기면서 소걸음으로 걷고 있다. 아마도 소액 투자가 주는 여유로움 덕분일 것이다.
돈의 속성을 차츰 알게 되면서,그동안 온통 모순으로 여겼던 현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가령 ‘인구는 감소하는데, 왜 부동산은 계속 오를까?’라든지, ‘인구 감소에 따른 해결책은 없는가?’ 등과 같은 물음들이다. 인문학에서 시원한 답을 주지 못했던 질문들이다. 하긴 답을 못하기로는 숱한 자기계발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노력하라! 마음으로 된다! 등 뜬구름 같은 소리만 할 뿐이었다.
고정관념도 바뀌어 갔다. 세계화에 대한 경우가 그렇다. 오랫동안 세계화는 양극화를 만든 알라딘 램프요, 미국 달러 지배를 위한 구도라고 생각했었다. 일부 내용은 사실이지만, 긍정적인 요소도 있음도알게 되었다. 지난 30년간, 인플레이션과 국제적인 전쟁이 억제될 수 있었던 것은 세계화 덕분이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바이다.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이 있듯이, 뒤늦게 알게 된 경제의 세계는 나의 존재를 확장시켜 주었다. 더불어 자본 시장의 원리를 알게 되면서,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말이 진실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현상계를 움직이는 동력은 이념보다는 우리의 욕망이었으며, 이 욕망을 대하는 태도와 지혜로운 처리가 세상의 빛과 어둠을 결정하고 있었다.
#3
예전에는 경제 신문을구독하는 이들이 신기했었고, 주식을 하는 벗이 있으면 만류을 했었다. 성서에 나와있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라는 구절에서 정신 승리를 얻곤 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돈과 물질에 대한 막연한 부정적인 감정이랄까? 일종의 적대감이었다.
걱정의 총량은 반도체, 환율, 금리, 연금, 에너지, 전기차, 부동산 등에 대한 물질계의 이치를 이해하는 만큼 증가되었다. 이 작은 땅에 살면서 세상을 염려하는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한다. ‘식자우환’이란 말에 어울리는 근심의 향연일까? 이런 내 걱정을 두고 아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당장 마이너스 통장 입금이 시급한데 말이다. 문득 허생의 마누라 마음이 헤아려진다. 모쪼록 이 모든 걱정들이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경제를 배우면서 위선적인 선동과 확증 편향이란 덫을 헤아리는 알음알이가 생겼다. 며칠 전, 집 앞 사거리에 이 지역 국회의원의 추석 인사 현수막이 걸렸다. 거기에는 한복 입은 그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눈길을 끄는 것은 “민생을 책임지겠습니다.”라는 큼직한 문구였다. 일면식 없는 그가 내 생활을 책임지겠다고? 고맙긴 한데, 픽~ 하는 웃음이 나왔다. 다음 선거의 표를 의식하는 그의 속마음이 보름달처럼 환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4
현재 나의 투자는 푼돈을 아껴서 매수한 탓에 소액일망정 애틋하다. 여전히 주린이를 벗어나지 못했고, 수익 또한 신통치 않지만, 자본의 이치를 배우는 기쁨만은 즐겁다. 이러한 나를 두고 팔자에 없는 고생을 사서 하느냐? 며 비웃을지라도 상관하지 않겠다. 이왕이면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보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구절에 방점을 찍고 살겠다. 공자님께서도 "배우고 익힌다면 역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悅乎)? "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찌 배움을 돈의 가치로만 따질 것인가? 명절날 차례상에 놓이는 지방(紙牓)에는 '현고 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학생은 삶의 시작과 끝을 배움으로 사셨다"라는 의미다. 배우려는 마음, 이른바 '학생 정신'으로 삶을 지켜내는 것. 그것이 진짜 인생이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