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발을 뒤로 단정하게 묶은 귀여운 여자아이가 무대로 걸어온다. 활짝 미소를 띤 얼굴이 눈부시다. 화려한 무대임에도 전혀 주눅 든 표정이 아니다. 관객들은 눈을 크게 뜨고선, 꼬마 숙녀의 노래를 기다린다. 드디어 “오~우 달링”이라며 노래를 시작하자 객석이 술렁인다. 그 깜찍한 입에서 비틀스의 <oh! darling>을 절규한다. 절정 부분에서는 흥에 겨워 발을 구른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진다.
며칠 전에 보았던 SNS의 영상이다. 어린아이가 비틀스의 <오! 달링>을 저토록 감정을 담아서 노래할 수 있다니 놀라웠다. ‘달링’이란 말의 설렘을 알고는 있을까? ‘달링’은 내 안에서 반짝이는 그를 위해 바치는 핑크빛 화환이다. 눈에 콩깍지가 써질 때 나오는 말, 내 사랑 'oh! darling'은 행복한 단어다.
청춘의 빛깔은 핑크다. 안갯속에 숨어있는 ‘달링’을 찾아 헤매는 인생의 봄날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이 있었듯이, 내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나의 ‘달링’은 아주 유별났다. 일단 그녀는 중국어에 달인이었고, 하늘을 마구 날아다녔으며, 싸울 때는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는 엄청난 힘의 소유자였다.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영화관이었다. 나의 ‘달링’은 동방불패, 홍콩 무협 영화 주인공이다.
무협지를 탐독하고 쌍절권을 돌리던 우리 세대는 홍콩 영화 열혈팬들이었다. 이소룡의 절권도와 괴성에 세례 받았고 ‘취권’의 술 취한 성룡과 강시와 싸우던 홍금보를 따라 했다. 그때 한국 영화는 배우 안성기 홀로 분전하고 있었지만, 홍콩 영화의 내공 앞에 꼼짝 못 했다.
당시 추석 무렵에 개봉했던 ‘황비홍’은 연일 만원사례였다.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영화관에 입장해도 빈자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상영 도중에 자리를 뜨는 관객의 좌석을 노리며 기다릴 뿐이었다. ‘황비홍’의 열기가 진정될 무렵, 극장의 대형 그림 간판에는 ‘동방불패(東方不敗)’라는 홍콩 무협영화가 걸려 있었다. 동방불패는 스물아홉 청년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든 오! 달링, 임청하가 나오는 무협영화의 결정판이었다..
‘동방불패’는 중국 무협소설의 대가인 ‘김용’의 손에서 탄생했다. 김용의 또 다른 작품 ‘소오강호’와 형제 격인 작품이다. 동방불패는 <규화보전>을 얻어 극강의 내공을 쌓는 과정에서 남성에서 여성으로 몸이 바뀐 존재다. 일월신교 교주 동방불패는 어마 무시한 괴력으로 천하를 움켜쥐려 했으나, ‘영호충’이란 순수남을 사랑한 탓에 죽음을 맞게 되는 비련 속의 여인이다.
천하 신공 동방불패를 연기한 배우는 ‘임청하’다. 촬영 당시 그녀는 서른여덟 임에도, 절정의 연기를 뿜어냈다. 영화 속 ‘임청하’는 사자의 눈과 붉은 입술 그리고 긴 머릿결을 휘날리며 허공을 가로지르던 무서운 마녀였다. 그녀가 손을 쫙~ 뻗으면 수십 개의 바늘이 허공을 갈랐고, 붉은 도포 자락을 휙~ 하니 뒤로 넘기면 천지가 벼락처럼 요동쳤다. 동방불패는 카리스마 으뜸인 달링이었다.
폴 메카트니가 만든 <오! 달링>은 비틀스의 4대 명반으로 꼽히는 1969년 앨범 <Abbey Road>에 수록되었다. 비틀스의 <오! 달링>은 블루스 분위기와 느린 샤우팅 기법이 인상적이다. 폴 메카트니의 거친 소리가 유난스러운 곡이다. 존 레넌은 폴에게, 자신이 부를 수 없겠냐고 했지만 결국 부르지 못했다.
존 레넌과 오노 요코가 가까워지는 만큼, 다른 멤버들 사이에는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폴이 반어적으로 노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 달링>은 폴이 존에게 보내는 하소연이라는 뒷말도 있다. 여러모로 폴의 오기가 스며 있는 곡인데, 이들은<Abbey Road> 앨범 제작 과정에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중이었다.
“오! 그대, 만일 당신이 절 떠난다면, 저는 혼자서는 해내지 못할 거예요. 저의 애원을 제발 믿어 주세요. 저를 홀로 남겨두지 마세요.” <오! 달링>의 한 구절이다. 밴드보다는 오노에게 빠졌던 존 레넌에게 극도의 불만이 쌓여가던 때이다. 그래서일까? 멀어져 가는 존에 대한 폴의 안타까움이 노래 말에서 느껴진다.
영화 동방불패의 마지막 장면은 아련한 여운이 압권이다. 호숫가에서 마주친 청년 영호충에게 호감을 느낀 동방불패였지만, 그 사랑의 감정 때문에 자신의 최강의 내공을 무력화시킨 채 죽음을 맞이한다. 피를 토하면서 절벽 아래로 추락하던 동방불패 임청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뭐든지 지나치면 탈이 나는 법이다. 사랑도 그렇다. 우정이건, 사랑이건 적당한 간격은 서로에게 적당한 방어막이 필요하다. 인간의 감정은 늘 변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주체할 수 없는 뜨거움보다는 절제된 무심함이 신뢰를 줄 수 있다. 인연에도 시작과 끝이 있는 법이다. 사랑했던 ‘달링’과도 헤어질 수 있으니, 그때는 성숙하게 인연의 마무리를 따라야 한다. 비록 야속한 ‘달링’일지라도 훗날 고마웠던 사람으로 추억되기 때문이다.
아내는 기념일을 자주 깜박하는 내 무딘 감성에 답답해한다. 만약 아내에게 느끼하게 “달링”이라 부른다면, 내게 무슨 잘못한 일이라도 있냐며 쌍지심을 지을 것이다. 마치 동방불패처럼 말이다. 나를 ‘영호충’으로 착각했을까? 어쩌라. ‘달링’이란 말로 대신할 수밖에.